40세, 다섯 아이 엄마로 등단한 고 박완서를 다시 읽다

머니투데이 대담=신혜선 문화부장, 정리=박다해기자 문화부 2016.02.0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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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딸 호원숙 작가가 말하는 '엄마의 힘'…"고통속에서도 유머, 평등한 일상을 존중했던…"

경기도 구리시는 지난달 27일 구리아트홀에서 박완서 작가 5주기 추모공연을 열었다. 추모공연은 단편 '티타임의 모녀' 낭독공연과 첼로연주·남성중창단 등의 음악회로 구성됐다. /사진제공=호원숙 작가경기도 구리시는 지난달 27일 구리아트홀에서 박완서 작가 5주기 추모공연을 열었다. 추모공연은 단편 '티타임의 모녀' 낭독공연과 첼로연주·남성중창단 등의 음악회로 구성됐다. /사진제공=호원숙 작가


‘나목’,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이 정도 나열이면 누구 얘기를 하려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고 박완서 작가. 그의 작품은 도대체 몇 편쯤 될까. 헤아리는 게 하나마나 한 짓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1970년, 40세에 자식을 다섯 둔 어머니이자 아내,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로 등단한 신인 작가라니. 2011년 80세 나이로 영면에 들기까지 40년간, 그는 마르지 않는 샘을 가진 양 쉼 없이 썼다. 이미 알려진 ‘기록’임에도 들을 때마다 새롭다.



박완서의 힘은 그의 고백을 통해 드러난다. “쓰지 않고 ‘그냥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때는 고통이었지만 지금은 그 체험들이 나의 밑천이니까.”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중에서 19쪽) “작가 아닌 채로 살았던 세월이 길었던 게 좋았다. 밑천이 많다. 작가 하면서 쓸거리를 고민한 적이 없다. 요새 젊은 전업 작가 걱정도 된다.”(같은 책 74쪽)

지난달 22일은 고 박완서 작가의 5주기였다. 큰딸인 호원숙 작가가 나섰다. 어머니 타계 5주기를 기념해 대담집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을 엮었다. 1980년부터 2010년까지 여러 문인, 교수, 평론가, 기자들이 한 어머니와의 인터뷰 중 10편을 골랐다.



책에 실린 인터뷰는 문답 형식이 대부분이다. ‘ㅂ(박완서)’으로 표시된 답글을 읽자니 미처 알지 못했던 작가 박완서, 아니 사람, 여자, 엄마로서 그를 이해하기 딱 좋은 책이 이만한 게 있을까 싶었다.

◇ "작가 아닌 채로 살았던 세월이 길어 좋았다"…마르지 않는 샘처럼 다작으로 놀래키다

호원숙 작가는 '행사 가면 윗자리를 찾지 않고, 진짜 대단한 권력자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어머니의 맘까지' 독자들이 기억하길 바랐다. /사진=이동훈 기자호원숙 작가는 '행사 가면 윗자리를 찾지 않고, 진짜 대단한 권력자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어머니의 맘까지' 독자들이 기억하길 바랐다. /사진=이동훈 기자
박완서가 작가가 되던 그 해, 호 작가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는 엄마의 첫 작품을 읽었을 때를 “혁명전야 같았다”고 회고했다.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이제는 우리의 오롯한 성(城)은 끝났어’ 하는 상실감이 몰려왔죠.” 완벽한 가정을 꾸리고 뒷바라지를 해주시던 어머니가 작가로 데뷔했으니 (엄마의 꿈을 알고 있었다 해도) 막상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상실감이 컸어요. 엄마는 해냈다, 앞으로도 해낼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다른 길을 가고 싶기도 했어요. 왜? 제가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호 작가는 어머니를 많이 닮은 듯하다. 호 작가는 "동생들이 더 많이 (어머니를) 닮았다"면서도 인정했다. "하지만, 뭐랄까요, 길을 가다 뭘 보는데 눈길이 같이 간다거나 책을 보다가 어떤 것에 감동하는 거, 이거 참 좋더라 하는 거. 그런 공통점이 많긴 해요. 그렇지만 못 따르죠. 어머니의 지식과 생각과 깊이는. 어떤 인터뷰에서 ‘어머니에 대해 질투를 느낀 적이 있느냐’라고 묻더라고요. 제가 그랬죠. '질투도 어느 정도 수준이 같을 때 느끼는 거다. 없다. 존경할 뿐이지'. 힘들 때는 있었어요. 버거워서. 우리 어머니는 노는 걸 못 봐요. (하하)”

부모는 자식에게 스승이지만 때론 넘어야 할 큰 산이기도 했다. ‘워킹맘’ 입장에서도 박 작가는 ‘부담스러운 여성’이었다. 너무 잘해냈으니. 하지만 박 작가는 ‘집안일도 작가도 완벽하게 한다’는 평판을 불편해 했다. “전업주부라는 직업이 더 고통스럽다”며 “저는 전업 작가가 아니었다. 편하게 쓴 게 아니다”라고 했다.(79쪽)

모든 딸은 엄마와 싸운다. 호 작가 역시 엄마와 갈등이 있었다. “제가 애 낳고 일을 그만뒀어요. 좋은 직업을 그만두고 애만 키운다고, 제가 아니라 엄마가 힘들어하는 거예요. 그 때문에 엄마와 거리를 둘 정도였죠. ‘나는 나다, 나는 내 가정에서 내 아이를 오롯이 키워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호작가는 기자였다. 그는 ‘(기자로서) 좋은 역할을 못했다’고 회고했다. “취재해야 하는데 캐묻기 싫은 성격도 한몫했어요. 아무리 말단 기자지만 해내는 게 있는데, 능력이 안 됐어요. 하하하, 내가 못한 거죠. 아이는 핑계고.” "너무 겸손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손사래 친다. 결혼 생활 자체의 존엄성도 있다고 말했다.

박 작가는 시쳇말로 ‘자식 농사’를 잘 지은 엄마였다. 그러니 실망도 당연해 보였다. (더군다나 호 작가에 따르면 엄마 박완서는 교육열이 대단했다. 그 시절엔 시험을 보고 중학교에 갔다. 박 작가는 딸이 한점이라도 더 받으라고 밤중에 데리고 나가 공던지기 연습까지 시켰다고 한다. 과외를 할 정도의 형편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당신의 연대기를 쓰라는 ‘숙제’를 주더라고요. 기가 막혔지만, 감사했어요. ‘너밖에 없다. 너밖에 나를 쓸 사람이 없다.’ 그런 의미였거든요.”

◇ "잘 키운 딸, 사회서도 성공하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 똑같았다

호원숙 작가는 다섯 형제를 대표해 엄마를 이야기한다. 형제들은 이번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의 표지 사진에 더 예쁜 사진을 넣고 싶었지만 이 사진을 모두 아낀다. 이 사진의 주인공은 엄마이자 엄마의 손이다. /사진=이동훈 기자호원숙 작가는 다섯 형제를 대표해 엄마를 이야기한다. 형제들은 이번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의 표지 사진에 더 예쁜 사진을 넣고 싶었지만 이 사진을 모두 아낀다. 이 사진의 주인공은 엄마이자 엄마의 손이다. /사진=이동훈 기자
호 작가는 어머니 작품을 꿰뚫고 있는 줄기 하나를 ‘유머’라고 말했다. “6. 25 때 아주 그냥 힘들기만 한 줄 아니? 재미도 있었단다.” 고인의 목소리를 흉내 내듯 나지막이 말하는 호 작가 입가엔 즐거운 웃음이 묻어났다. “인생이라는 거는 어떤 일이 닥쳐도 재밌다는 거죠. 그런 게 있으니(재미) 어떤 일이 닥쳤을 때도 지혜와 기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거잖아요. 힘들어도 자존심을 지켜야 해요. 남의 일을 해도 내가 일을 해서 먹고 산다는 숭고함이 있으니까요. 그러면 그건 을이 아닌 갑인 겁니다.”

호 작가는 “어머니는 천재, 어머니의 어머니(할머니)는 더 천재”라며 “자식들 모두 어머니보다 못했다”고 말했다. (호 작가의 수필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에서는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영향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독자들이 기억하길 바라는 어머니의 모습은 천재성만은 아니다.

“어머니의 문학에는 아주 많은 코드가 들어있어요. 그 코드를 잡아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죠. 어머니는 굉장히 다중적인 사람이에요. 읽기 쉽다고 해서 단순한 게 아니죠.”

‘자본의 힘이란 곧 가부장의 힘이라는 사실을 고발하고 싶었습니다.’ (78쪽) ‘우리가 이렇게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경제발전을 이루기까지 그 여자들의 싼 노동력에 빚진 게 많습니다. 그런 얘기를 나는 자꾸 하고 싶어요.’ (96쪽) 이런 인터뷰 답변을 보면 박완서 작가는 어떤 누구보다 현실 참여형 작가이자 페미니스트인 듯하다.

“엄마가 유명 국회의원을 만났는데 ‘작가님, 저를 모르시다니요. 저 TV에도 자주 나오는데’라고 했대요. 그에 대한 엄마의 답은 ‘그래요? 그래도 난 모르겠는데’ 하며 응대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다른 비유도 들었다. “40년 동안 어머니는 글 청탁에서 매체의 크기나 힘을 두고 고르지 않았어요. 방문판매를 했던 화장품업체의 손바닥만 한 홍보 책자에도 글을 써드린 걸로 알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동네에서 폐지를 줍는 아주머니가 문상 와 “선생님 같은 분이 없었다”며 슬피 우셨다는 일화도 전했다. “어머니는 어머니보다 못한 사람을 보살피고 예의를 지킨 게 아니에요. 그들과 동등하게 지냈습니다.”

그는 행사 가면 윗자리를 찾지 않고, 진짜 대단한 권력자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어머니의 맘까지도 독자들이 기억하길 바랐다.

그런데 왜 서문 제목은 ‘미처 물어보지 못한 물음들’일까. 그렇게 친한 듯 해도 ‘엄마를 아직도 모르겠다'는 의미일까.

"엄마도 그런데, 저는 물어보지 않아요. 물어보는 걸 싫어해요. 그저 제 성격이에요. 어떤 사람은 그거 얼마야? 얼마 주고 샀어? 그러잖아요. 전 안 물어봐요. 그냥 가만히 그 사람이 이야기를 듣고, 그가 말하기 전까지 안 물어요. 어머니한테도 그랬어요. ‘그때 6. 25 때 엄마, 정말 책에서처럼 그랬어?’ 이렇게 절대 안 물었어요."

호 작가는 엄마가 정말 숨기고 싶은 것은 물어봐도 이야기 안 할 거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을 물어보는 것은 굉장히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는 것.

"작품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요. 문학 속의 진실이니. 그 진실을 읽는 마음이어야 하니깐요. 물론, 내가 묻기 전에 꼭 내가 알아야 할 것은 얘기해주셨어요. 사실은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지 몰랐고, 저도 묻고 싶은 게 있어서."

호 작가의 미처 물어보지 못한 물음의 실체는 그리움이었다.

◇ "세상의 딸들아 그저 구르면서 가자…지혜와 도움을 구하면서"

고 박완서 선생이 살던 노란 집(구리 아천울). 현재는 큰딸인 호원숙 작가가 살림을 살고 있다. /사진= 이동훈 기자고 박완서 선생이 살던 노란 집(구리 아천울). 현재는 큰딸인 호원숙 작가가 살림을 살고 있다. /사진= 이동훈 기자
이젠 호 작가가 (시)어머니다. 어머니로서 세상의 모든 딸에게 뭐라 말해주고 싶을까.

“저는 아들만 있어서…. 그래도 (며느리를 보면서) 젊은 엄마들의 삶을 가깝게 안다고 봐요. 우리 때랑은 또 다르니 지금은 애만 키우고 전업주부로 사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아요. 막상 쟤(며느리)가 너무 힘들어 일을 안 하고 집에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더니, (하하하) 엄마 맘이 이해되더라고요. 굴러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어떻게든 굴러갑니다. 단, 혼자 하지 말고 도움을 청하고 지혜를 구하세요. 친정이든 시댁이든. 돈도 들여야겠죠. 완벽하게 다 잘하려고 하지도 말고요.”

엄마 작품 중 가장 아끼는 작품이 뭐냐 물었다. 호 작가는 '그 많던 싱아는~’ ‘그 산이 정말 거기~’ 두 권을 꼽았다. 그리고 "정확히는 좋아하는 게 아니라, ‘싱아’를 처음 읽었을 때 처음으로 감동했다"고 말했다.

"그전에는 감탄은 했으나 감동은 안 했거든요. 그렇지, 내 마음으로 감동은 안 했어." 이유는 뭘까. "어머니가 처음 쓰신 ‘나목’이라든가 그 이후 단편은 몰입할 수 없었어요. 너무 힘든 세월을 처음으로 들었는데, 어머니를 통해 들은 게 아니라 작품을 통해서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죠. 남의 것이 아니라 내 살을 뜯는 것 같은 괴로움. 괴롭고 힘들었죠."

그 시대를 지난 엄마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얘기다. 특히 그 작품은 박 작가가 아들을 잃은 고통 후 쓴 작품이다. "처음엔 엄마의 고통이 내게 와서 힘들었는데 ‘싱아’에서는 그것이 굉장히 순화된 거예요. 어머니가 따뜻한 마음으로 쓰신 게 느껴질 정도로. 어머니의 세계를 내가 따라가기엔 너무 멀다는 생각, 무척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박완서 작가는 ‘소설에는 누추한 생활을 뛰어넘는 힘이 있다’(141쪽)고 말했다. ‘체험조차 일종의 상상력’(77쪽)이라는 그의 이야기는 21세기 내내 ‘엄마’의 이름으로 오래오래 읽힐 듯하다.

◇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호원숙 엮음. 달. 217쪽/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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