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동행자란 거울에 나를 비춰보기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6.01.30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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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두산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

편집자주 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중국 선양의 한인촌 서탑가(西塔街) 풍경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중국 선양의 한인촌 서탑가(西塔街) 풍경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여행은 혼자 떠나는 게 좋을까요?” 이런 질문에 나는 대개 고개를 주억거린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은 무척 소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드시’라고 못 박을 생각은 없다. 마음 맞는 친구 두셋이 떠나는 여행도 나름대로 맛이 있다. 도시에서 못 보던 친구의 모습을 여행지에서 발견하기도 하고, 낯선 곳에서 낯선 환경을 함께 맞이하다 보면 정이 더욱 돈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들 틈에 섞여 떠나는 패키지여행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불가피하게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해 늦봄에 다녀온 백두산 여행이 그랬다. 여행보다는 관광에 가까웠지만, 개인여행이 쉽지 않은 곳이니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동행한 참이었다. 까까머리 시절 이후 수십 년 만에 함께 떠나는 여행은 과거로 돌아가는 열차라도 탄 듯 설렘을 동반했다.



중국 도착 첫날은 선양(瀋陽)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일정이었다. 선양은 우리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고 발해의 영향권에 있었던 땅. 일제의 핍박에 못 이겨, 나라의 독립을 이루겠다는 큰 뜻을 품고, 혹은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 국경을 넘은 우리 선조들 중에 선양까지 간 이들도 꽤 있었다. 이야기 삼아 자주 듣던 만주 봉천이 바로 그곳이다.

저녁 무렵 가이드가 식당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말로만 듣던 북한식당이었다. 중국을 몇 번 오갔지만 북한식당에서 식사할 기회는 없었다. 거부감이 들 이유 같은 건 없었고, 되레 좀 반가웠다. 하지만 연세가 지긋한 몇 분은 무척 당황한 표정이었다.



식당으로 들어가니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성들이 밝은 인사로 맞이했다. 새삼 남남북녀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고운 자태였다. 2층 방에는 일행 14명 전부가 둘러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원탁식탁이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도 어른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런 마당에, 잔뜩 부풀어 오른 풍선에 바늘을 찌르는 일이 일어났다. 종업원이 물병과 김치를 갖다 놓더니 그 다음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예약이 되어있지 않거나 느닷없이 들이닥친 손님이 많은 날인 것 같았다.

내내 표정이 굳어있던 어른 한 분이 종업원을 불러 “김치만 갖다놓고 음식은 언제 줄 거냐”고 과도할 정도로 언성을 높였다. 종업원의 표정이 거북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가 나가자 이번엔 가이드가 불려와 경을 쳤다. “왜 북한식당으로 왔느냐”가 핵심 내용이었다. 자신은 북한의 ‘북’ 자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것이었다. 가이드가 “북한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이 아니고 중국인이 북한 여성들을 고용했을 뿐”이라고 설명했지만, 고성과 짜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집권자가 밉다고 타국에 돈 벌러 나온 사람들까지 미워할 건 뭐람? 다른 일행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에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대부분 처음 보는 사이고 인사를 나눌 틈도 없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니 분위기는 썰렁하다 못해 싸늘하게 변했다. 북한 종업원은 아예 들어올 기미가 없고 가이드만 불난 집 며느리처럼 들락거린 뒤에야 음식이 나왔다. 모두들 묵묵히 밥을 떠 넣었다. 좋은 기분으로 떠난 여행의 첫 식사가 이 모양이라니….


중국 쪽에서 바라본 압록강 건너 북한 땅/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중국 쪽에서 바라본 압록강 건너 북한 땅/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나중에 들어보니, 화를 낸 그분은 6.25때 피난 내려온 실향민이란다. 먼발치에서나마 고향 땅을 바라보기 위해 압록강, 백두산을 찾아온 것이었다. 반세기도 훨씬 더 지났지만 북쪽의 위정자들에 대한 증오는 조금도 덜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남의 나라에서 내 민족의 비극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다.

압록강에 도착해서야 그분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강가에는 식당에서 고함을 지르던 사람이 아니라, 강 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짓는 노인이 서 있었다. 빈손으로 쫓기다시피 떠난 고향, 뻔히 보이는데도 건너갈 수 없는 저곳….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한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는데 그 모습으로 충분했다.

모처럼 떠난 패키지여행에서도 배울 것은 참 많았다. 여행은 동행자라는 이름의 거울에 나를 비춰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동행자란 거울에 나를 비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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