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시리스'…5만원권 불필요한 사회 오나

머니투데이 이병찬 이코노미스트 2015.11.2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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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고르기]세계 각국에 확산되는 '현금 거래 제한 및 금지' 움직임(上)

편집자주 변동성이 점점 커지는 금융경제 격변기에 잠시 숨고르며 슬기로운 방향을 모색합니다.

/그래픽=임종철 디자이너/그래픽=임종철 디자이너


지난 13일 금요일 밤 13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프랑스 파리 테러가 전 세계를 공포와 분노에 떨게 한 가운데 때마침 터키에서 열린 G20회의에서 ‘테러리즘 대응 성명’이 채택됐으며, 20일에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테러격퇴를 위한 ‘유엔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번 성명과 결의안에 포함된 테러 퇴치를 위한 테러자금 차단과 관련해 그동안 꾸준히 국제사회에서 제기 돼온 '테러의 원천적 차단을 위한 현금 사용 금지'에 대한 요구가 강한 추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편리와 효율'이라는 강력한 효용을 가지고 급격히 진행되어온 글로벌 ICT혁명은 상당 부분의 현금을 사라지게 했다. 여기에 '안전과 공정’의 가치가 보태 지면서 지구촌 전체가 ‘캐시리스(cashless)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다.

캐시리스 사회가 주는 매력은 많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테러와 부정부패, 탈세 등의 어두운 거래에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현금이 사라진다면 공정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앞당기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현금이 디지털로 대체되면서 간편성, 신속성, 정확성, 효율성 등이 향상되어 전반적인 삶의 수준이 높아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현금 거래 금지는 금융 위기를 예방하고 조속한 정상화를 가져온다는 장점까지 주장 되고 있다. 올해 초 발생한 그리스 재정위기상황에서 ‘뱅크런’을 방지하기 위하여 현금인출한도를 1인당 하루 60 유로로 제한했던 조치는 요즘 처럼 금융위기가 빈번한 시대에서 현금 퇴출의 정책적 효용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반면에 현금 거래 금지에 수반되는 개인 정보 침해의 우려는 많이 희석되는 분위기다. 편의를 위하여 제공된 개인정보는 가랑비에 옷 젖듯이 노출돼 이제는 문제를 느끼지 못 할 정도로 자연스러워졌다. ICT혁명 시대를 향유하기 위한 댓가로 일정부분 개인정보 노출은 불가피하다고 용인하는 상황이고 또 보안기술의 발전이 프라이버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올해 1월 스위스 다보스 회의에서 하바드대학 컴퓨터사이언스 교수 마고 셀처(Margo Seltzer)는 "우리가 아는 전통적인 프라이버시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프라이버시에 대한 공격은 더욱 광범위해지고 있다" 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회의 참가자인 안소니 골드블룸(Anthony Goldbloom, 벤처기업 Kaggle의 CEO)은 "이른바 구글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달리 프라이버시를 크게 중시하지 않는다. 나는 프라이버시와 편리함을 바꿨다"는 말로 이 같은 시대의 변화를 드라마틱하게 설명했다.

이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선진국을 중심으로 현금 퇴출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을 뿐 아니라 상당 부분 현실화 되고 있다.

하바드대학의 경제학교수 케네스 로고프(Kenneth Rogoff)는 지난해 5월 파이낸셜타임스 칼럼(Paper money is unfit for a world of high crime and low inflation)을 통해 현금을 없애면 금융위기시 중앙은행의 손발을 묶는 제로금리의 한계를 없앨 수 있고, 징세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티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윌렘 비터(Willem Buiter)도 로고프교수의 의견에 적극 동조하고 마이너스금리의 정책적 효과를 위하여 현금 퇴출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글로벌 저성장의 고착화 상태에서 양적완화가 의미있는 정책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 그 유효성이 부각되고 있다.

금융 정책을 위한 현금 금지의 필요성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강력한 주장은 안전과 공정을 위한 현금 퇴출 요구이다. 실제로 테러와 범죄 집단의 자금 조달을 차단하고 자금 세탁 및 탈세 방지 목적을 위하여 현금 폐지에 준하는 제한을 엄격하게 설정하고 관리하는 국가들이 늘어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고액현금거래보고’제도에 따라 2천만 원 이상 현금 입출금 시 금융기관의 의무보고 제도가 있을 뿐, 현금거래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선진 주요 국가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현금 거래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와 포르투갈은 1천 유로(원화 125만원)이상의 현금 거래를 금지하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수준이며, 그리스 1천5백 유로, 스페인 2천5백 유로, 벨기에 5천 유로로 소액 생필품 거래를 제외한 현금 거래는 사실상 퇴출 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난해 5월 기업은 5천 세켈(150만원) 개인은 1만5천 세켈(440만원) 이상 현금 거래를 금지하는 법안을 마련했고, 미국 루이지애나주는 2011년부터 중고품의 현금 결제를 금지하고 있다. 이외 영국,덴마크,스웨덴 등 많은 선진 국가들에서 불법과 탈세 방지 목적의 현금 거래 제한이 확산되고 있다.

이 같은 선진국들의 현금 금지 추세는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를 생각하면 유사한 수준의 현금 금지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적어도 지금처럼 5만원권 회수율(지난해 25.8%)을 가지고 논란이 되는 일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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