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이 구축한 국가들의 형태가 발전되어 가면서 행정과 사법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몫이 문화이지 않나 싶다. 문화의 힘은 고대 국가들이 탄생했을 때부터 국가의 운명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니 강대국으로 세계를 재패했던 나라들을 보면 건축으로부터 문화 예술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는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현재도 문화유산으로 연명하는 나라가 있으니 그 위력을 알 만 하다.
필자가 모스크바에 살 때 두 딸이 음악을 하는 관계로 연주회장을 찾는 일이 많았다. 각종 콩클에 참가를 할 때도 필자는 늘 러시아 사람들과 같이 청중석에 앉아 그들의 호흡을 민감하게 살피곤 했다.
나이 드신 노인들의 클래식 사랑은 유럽의 어느 나라 못지않았다. 콩클에서는 참가자들의 연주를 듣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에 돋보기를 끼고 진중한 자세로 자기 나름의 성적을 매기고 있었으며 등수까지 점쳐 놓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비록 유럽처럼 아주 잘 차려 입지는 않았지만 러시아 할머니들은 어디서나 당당하고 자신있게 행동했다. 그런 그들의 자긍심은 알아주어야 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도 할머니들이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많이 찾아온다. 그리고 어린 나이의 손자 손녀들에게 지켜야 할 행동과 예의 범절을 깐깐히 가르치는 것을 보고 상당히 인상 깊었다. 러시아에서도 부모들이 맞벌이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할머니들이 도와주고 있는데 진심과 진정어린 사랑의 훈육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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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있었다. 필자의 딸이 피아노를 전공하기 때문에 집에서 연습을 많이 했다. 어느 곳이나 이사를 하면 제일 먼저 윗집, 아랫집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 하고 이해를 구하는데 그럴 때마다 시간 약속을 하고 선선히 동의해 주었다. 그렇게 모스크바에 17년을 살면서 한 번도 얼굴 붉힌 적이 없이 충분한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집에 방음장치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주변의 모든 이들이 너그럽게 음악을 듣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하루 오후에 장을 보러 딸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마침 아랫집 할머니가 동승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단번에 딸을 보더니 “요즈음 왜 연습을 많이 안하는 것이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멍하니 서 있는데 할머니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나는 밤 10시 까지 연습해도 괜찮다. 네가 연습하지 않으면 게으른 거 같아서 오히려 화가 난단다. 열심히 연습하거라” 우리는 할머니에게 고개를 숙여 배꼽 인사를 하고 기쁨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야-후!”
음악하는 사람들의 고충은 집에서 연습하는 문제다. 그런데 이런 할머니를 이웃으로 두다니 가히 축복 받은 인생이랄 수 있었다. 그 후로도 한 번도 연습 때문에 다툼을 벌인 일이 없었으니 모스크바 할머니의 축복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 같아 가끔은 생각이 난다. 러시아 할머니들의 문화수준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