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행주치마 하면 남정네도 한 사람 떠오른다. 드라마 <징비록>에서 왜적을 맞아 동분서주하고 있는 권율 장군이다. 이 남자, 행주대첩으로 임진왜란의 판도를 단숨에 바꿔버렸다. 전쟁영웅과 행주치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조합은 정체불명의 민간어원설이 끼어들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행주대첩 당시 부녀자들이 치마를 이용해 돌을 날랐는데, 행주치마가 여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민간어원의 역조’는 권율과 행주대첩의 참모습을 밝히는 데 지장을 초래한다. 1593년 2월 12일 한강 연안의 덕양산에 위치한 작은 토성으로 왜적 3만 명이 몰려왔다. 방어에 나선 조선군은 관군과 승병을 합해도 3천 명에 못 미쳤다. 하지만 전라도순찰사 권율은 소수의 병력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해 열 배가 넘는 적들의 파상공세를 물리쳤다. 그 승리의 요인들은 역사적 통념과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다음으로 행주대첩은 백병전이나 투석전이 주가 아니었다. 나중에 선조에게 보고한 대로라면 이날 왜적의 돌격은 8~9차례 있었는데 대부분은 화력으로 막아냈다. 권율은 이 싸움에 조선이 자랑하는 최신병기들을 총동원했다. 새로 개발한 화차는 신기전 수백 발을 장전해서 동시에 발사할 수 있었다. 비격진천뢰는 일종의 시한폭탄인데 화포로 멀리 쏘아보내기도 했다. 또 적의 조총에 대응하는 승자총통 등도 위력을 발휘했다. 전투의 성격상 부녀자가 돌을 나를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행주치마에 가려진 조선육군의 무력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한양 수복을 위해 전라도에서 북상한 권율군은 한 마디로 상승부대였다. 그들은 행주대첩 이전에 이치전투, 수원독성산성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특히 이치에서는 전주로 들어가려는 왜적을 격파함으로써 조선의 곡창인 호남을 지켜냈다. 행주대첩은 그 완성판이었다. 이로써 전쟁수행 능력을 입증한 조선은 왜적과 명나라에 짓밟힌 주권을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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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행주산성의 입구인 대첩문에 들어서면 ‘권율 장군과 행주치마’라는 안내판과 함께 여성의병대가 치마로 돌을 나르는 부조가 눈에 밟힌다. 지금의 이 모습은 1970년 행주산성 정화사업 이후 재탄생한 것이다. 어디선가 ‘새마을노래’가 울려 퍼지고 ‘군관민 일체’의 구호에 이끌려 부엌데기 여성들이 산업현장으로 행진하는, ‘대한늬우스’ 풍의 시간이 재깍재깍 돌아가고 있다. 그게 1593년 2월 12일을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