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2월 12일의 대한늬우스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5.07.1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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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27 - 권율 : 행주치마에 가려진 조선육군의 무력

1593년 2월 12일의 대한늬우스


행주치마는 옛날 여자들이 부엌일을 할 때 치마 위에 덧입었던 짧은 치마를 말한다. 요즘의 앞치마와는 용도가 좀 다르다. 손과 그릇의 물기를 훔치기도 하고, 뜨거운 솥뚜껑을 들어올리기도 했다. 때로는 여인네의 한과 눈물도 닦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행주치마 하면 남정네도 한 사람 떠오른다. 드라마 <징비록>에서 왜적을 맞아 동분서주하고 있는 권율 장군이다. 이 남자, 행주대첩으로 임진왜란의 판도를 단숨에 바꿔버렸다. 전쟁영웅과 행주치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조합은 정체불명의 민간어원설이 끼어들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행주대첩 당시 부녀자들이 치마를 이용해 돌을 날랐는데, 행주치마가 여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행주치마’라는 단어는 이미 중종 때 최세진이 지은 ‘사성통해’(1517년)와 ‘훈몽자회’(1527년)에 등장한 바 있다. 임진왜란(1592년) 전부터 써왔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위의 설은 발음이 비슷한 낱말을 엮어 그럴 듯하게 어원을 설명하는 민간의 구전일 뿐이다. 문제는 그것이 거꾸로 실제 역사처럼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사와 야사를 통틀어 어떤 문헌에서도 근거를 찾아볼 수 없지만, 전장으로 돌을 날랐다는 부녀자들의 미담은 공공정보나 출판물 등에 버젓이 팩트로 소개되고 있다.

‘민간어원의 역조’는 권율과 행주대첩의 참모습을 밝히는 데 지장을 초래한다. 1593년 2월 12일 한강 연안의 덕양산에 위치한 작은 토성으로 왜적 3만 명이 몰려왔다. 방어에 나선 조선군은 관군과 승병을 합해도 3천 명에 못 미쳤다. 하지만 전라도순찰사 권율은 소수의 병력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해 열 배가 넘는 적들의 파상공세를 물리쳤다. 그 승리의 요인들은 역사적 통념과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먼저 행주산성은 부녀자 등 민간인과 무관한 곳이었다. 권율은 이곳에 한양 수복을 위한 교두보를 구축하고 안팎으로 성책을 만들어 왜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행주산성은 철저하게 기획된 싸움터였다. 공성전을 펴려면 아래에서 밀고 올라와야 하는데 이 경우 조총의 위력은 반감된다.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권율도 싸움터를 주도적으로 정하고 적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런 곳에 민간인이 머물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부역에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산성에는 공병대 격인 승병이 와있었다.

다음으로 행주대첩은 백병전이나 투석전이 주가 아니었다. 나중에 선조에게 보고한 대로라면 이날 왜적의 돌격은 8~9차례 있었는데 대부분은 화력으로 막아냈다. 권율은 이 싸움에 조선이 자랑하는 최신병기들을 총동원했다. 새로 개발한 화차는 신기전 수백 발을 장전해서 동시에 발사할 수 있었다. 비격진천뢰는 일종의 시한폭탄인데 화포로 멀리 쏘아보내기도 했다. 또 적의 조총에 대응하는 승자총통 등도 위력을 발휘했다. 전투의 성격상 부녀자가 돌을 나를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행주치마에 가려진 조선육군의 무력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한양 수복을 위해 전라도에서 북상한 권율군은 한 마디로 상승부대였다. 그들은 행주대첩 이전에 이치전투, 수원독성산성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특히 이치에서는 전주로 들어가려는 왜적을 격파함으로써 조선의 곡창인 호남을 지켜냈다. 행주대첩은 그 완성판이었다. 이로써 전쟁수행 능력을 입증한 조선은 왜적과 명나라에 짓밟힌 주권을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행주산성의 입구인 대첩문에 들어서면 ‘권율 장군과 행주치마’라는 안내판과 함께 여성의병대가 치마로 돌을 나르는 부조가 눈에 밟힌다. 지금의 이 모습은 1970년 행주산성 정화사업 이후 재탄생한 것이다. 어디선가 ‘새마을노래’가 울려 퍼지고 ‘군관민 일체’의 구호에 이끌려 부엌데기 여성들이 산업현장으로 행진하는, ‘대한늬우스’ 풍의 시간이 재깍재깍 돌아가고 있다. 그게 1593년 2월 12일을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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