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결권위가 투자위원회의 의결권 행사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체적으로 회의를 소집한 것은 2006년 의결권위 출범 이후 처음이다. 의결권위는 국민연금 최고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위원장 보건복지부 장관) 산하의 자문기구로 국민연금이 보유한 주식의 의결권 행사를 심의, 의결한다.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하면서 정치적 편향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만들었다.
투자위원회와 의결권위의 판단이 엇갈릴 경우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관한 최종 결정권이 어느 기구에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는 얘기다. 국민연금 한 관계자는 "해석의 여지가 넓어 애초부터 문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당초 3시간으로 예정됐던 의결권위가 회의장 예약시간을 연장하며 6시간 가까이 이어지자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 결정을 놓고 모종의 의견이 제시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의결권위가 합병 찬반에 대한 별도의 의견을 냈다면 법리 해석 등을 둘러싼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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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결권위의 법적 위상과 역할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국민연금의 자문기구일 뿐인데 의결권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다. 비슷한 성격의 성과평가보상 전문위원회나 투자정책전문위원회에는 결정권이 없다. 정치적 편향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라는 명분으로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치적 편향성을 최소화한다지만 위원 구성상 태생적으로 정치적 고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비판도 나온다. 2012년 SK (207,000원 ▼12,000 -5.5%)그룹 최태원 회장의 SK하이닉스 (183,800원 ▲3,900 +2.17%) 이사 선임을 위한 주주총회 당시에는 국민연금이 의결권위에서 찬성 3명, 반대 3명, 기권 1명, 중립 1명, 불참 1명으로 중립 의견을 내자 반대표를 던졌던 지홍민 의결권위 임시위원장과 김우찬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연구원 교수가 사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당시 지 교수는 사퇴 이유에 대해 "위원들은 추천자가 누구든 추천기관의 이익을 대변해서는 안 된다"며 "의결권위가 설립 당시 목표를 실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의결권위는 정부 추천 2명, 사용자대표 추천 2명, 근로자대표 추천 2명, 지역가입자 대표 2명, 연구기관 1명 등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를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기준과 의결권위의 위상, 의결권위 위임 기준 등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기업소송연구회장)는 이날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경영권 방어와 기업지배구조 논란'을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지침에 '국내 자본시장 보호' 규정을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지침은 주주가치 훼손과 주식매수청구권 확보 등에 제한돼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이번 사태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발목 잡는 계기가 돼선 곤란하다"며 "의결권위가 오는 17일 삼성물산의 합병 주총 이후 절차상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면 국민연금 지배구조 개편 등과 맞물려 관련 논의를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