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결권 행사 '외부위원회 덫'에 빠진 국민연금

머니투데이 심재현 기자 2015.06.29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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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지분 추가 매수하고 의결권은 반대 행사…한입으로 두말한 꼴
삼성 합병서도 재연 가능성 높아…"책임 공방 피하려다 논란 자초"

SK·삼성 등 대기업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두고 국민연금이 '외부위원회의 함정'에 빠졌다.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취지로 민감한 안건을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전문위원회에 맡겼지만 추가 지분을 사면서도 합병은 반대한 모양새가 되면서 오히려 한입으로 두말한다는 비판을 자초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2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지난 4월20일 SK그룹의 법상 지주사인 SK (207,000원 ▼12,000 -5.5%)와 사실상의 지주사인 SK C&C (161,800원 ▼1,700 -1.04%)의 합병 계획이 발표된 이후 주주확정일인 지난달 6일까지 양사의 지분을 각각 0.61%포인트, 1%포인트 추가 매수했다. 양사의 합병 승인을 위한 주주총회가 열린 26일 기준 국민연금의 보유지분은 SK가 7.8%, SK C&C가 7.9% 수준이다.



국민연금이 SK그룹의 합병 계획 발표 이후 지분을 추가 매수한 것은 합병안이 양사 주가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 자산운용사 고위 임원은 "합병비율이 SK 주주에게 불합리하게 결정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와중에 지분을 추가 매수한 것은 이런 분석에 크게 공감하지 않았거나 합병 이후 주주가치 제고 등을 염두에 두고 통합법인의 지분을 늘리려고 했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의결권 행사 '외부위원회 덫'에 빠진 국민연금


문제는 국민연금이 SK 지분을 추가 매수하면서도 합병안에 대한 입장은 '반대'로 정리했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은 SK 주총을 이틀 앞둔 지난 24일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이하 의결권위)를 열고 합병비율 등을 고려할 때 SK 주주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기로 결정했다.



국민연금의 이런 이중적인 행보는 의결권 행사를 자체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외부에 위임한 결과다. 국민연금은 기업의 주총 안건과 관련, 대부분의 의결권은 투자를 담당하는 기금운용본부 내 투자위원회에서 결정하지만 SK 합병안에 대해서는 민감한 사안이라는 이유로 의결권위에 판단을 요청했다.

의결권위는 정부, 사용자단체, 근로자단체, 연구기관 등에서 추천하는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사실상의 외부 위원회다. 기금운용과 관련된 인사의 참여가 배제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기금운용본부와 견해차를 보일 여지가 많다.

의결권위의 이번 결정도 통상 주주가치를 중심으로 의결권 행사 방향을 판단하는 기금운용본부와 달리 공적연금으로서 국민연금의 위상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내린 결과라는 게 복수 의결권위원의 설명이다. 한 의결권위 위원은 "합병하는 두 기업의 지배주주가 같은 경우 합병비율이 지배주주에게 유리하게 결정됐다면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며 "이를 두고 국민연금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기금의 성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게 다수 의견이었다"고 전했다.


국민연금이 다음달 삼성물산 (48,100원 ▲2,300 +5.0%) 주총에서도 비슷한 행보를 반복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합병비율이 삼성물산에 불공정하게 결정됐다는 분석이 제기된 데다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이 합병안 발표 이후 삼성물산 지분을 35만주 이상 추가 매수하는 등 여러 면에서 SK 사례와 상황이 닮았다.

시장 한 전문가는 "삼성이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안건이 의결권위로 넘어갈 경우 SK와 같은 결론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며 "이렇게 되면 국민연금이 한입으로 두말한다는 얘기가 또 나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국민연금 안팎에서는 '삼성 합병'이라는 돌발변수만 없었다면 SK 안건이 투자위원회 수준에서 무난하게 처리됐을 문제라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SK 합병 주총을 앞두고 삼성그룹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대결 양상이 빚어지면서 SK 사안이 의결권위로 싸잡아 넘어갔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에 정통한 한 인사는 "국민연금이 향후 제기될 수 있는 책임 공방을 피하기 위해 외부 위원회에 결정을 떠밀었다가 논란을 자초한 것"이라며 "의결권위에 계속 결정권을 떠넘기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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