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막전막후…전두환, 알프스 상공 전용기서 도입 결정

뉴스1 제공 2015.05.14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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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직 보건복지부 장관 참여한 '실록 국민의 연금' 숨은 에피소드 전해
대통령은 집권 내내 도입에 부정적…숙원사업 유럽 4개국 순방 이후 물꼬

(서울=뉴스1) 음상준 기자 =
국민연금 도입을 반대하다 임기 후반에 찬성으로 돌아선 전두환 전 대통령./© News1국민연금 도입을 반대하다 임기 후반에 찬성으로 돌아선 전두환 전 대통령./© News1


1986년 4월 21일. 유럽 4개국 순방을 마친 전두환 대통령이 전용기인 공군 1호기에 올랐다.

오랫동안 꿈꿨던 유럽권 국가의 국빈 방문에서 예상외의 성과를 거둔 기분 좋은 귀국길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는 국제 사회로부터 늘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다. 그래서 줄기차게 시도한 국빈 방문이 임기 후반 가까스로 성사될 수 있었다.

대통령 전용기가 알프스 상공을 지날 무렵이었다. 수행원으로 동행 중이던 김만제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가 사공일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사공 수석이 대통령에게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각하 듣기 싫은 얘기일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방문한 영국, 독일 등이 부국인 이유는 은퇴자들이 노후에 빈곤을 걱정하지 않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다 연금제도 덕분이지요."

사공 수석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들 나라는 1900년 전후로 제도를 도입해 지금은 완전히 성숙됐습니다. 우리는 1974년 도입하려다 석유 위기 때문에 미뤄오고 있고요. 우리 경제도 많이 성장했으므로 국민연금제도를 정비해 국민들이 노후 빈곤을 걱정하지 않고 살게 해줘야 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장 혜택을 주는 게 아니라 인기가 없을지 모르지만 의료보험처럼 적자를 보는 일도 없을 겁니다."

아무 말 없이 얘기를 듣던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참 질긴 사람들이구먼. 내가 그렇게 안 된다고 말해왔는데 말이지.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은 다르다 이거지요. 좋습니다. 도입을 검토해보세요. 다만 노조와 경영자 단체들의 반대가 심할 것 같은데 잘 얘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들로부터 원만히 동의를 얻어낸다면 허락하겠소. 조건부 승인입니다."

최근 소득대체율 인상 문제로 정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국민연금 도입이 결정된 장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청와대가 아닌 알프스 상공을 지나던 대통령 전용기였다.

연금제도 도입을 줄곧 반대해온 전두환 대통령이 마음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고대하던 숙원사업인 유럽순방을 마친 기쁨 때문인지, 아니면 참모들의 집요한 설득에 넘어갔기 때문인지.

이후 국민연금 도입에 필요한 작업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4개월 뒤인 1986년 8월 11일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연금 도입을 공식화했다. 이후 같은 해 9월 30일 국민복지연금법 개정안이 확정되고 3달여 뒤인 12월 17일 국회를 통과했다.

이는 전·현직 보건복지부 장관을 인터뷰하고 국내 연금 권위자들이 집필진으로 참여한 '실록 국민의 연금' 책자의 일부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전두환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국민연금 도입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1981년 1월 3일 전두환 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당시 KDI(한국개발연구원) 김만제 원장은 국민연금 도입을 포함한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기본구상'을 발표했다.

보고를 다 들은 대통령은 특별한 논평을 하지 않았다. 내심 대통령의 반응을 기대한 경제 부처 각료들과 김만제 원장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전 대통령이 당시 국민연금 시행을 반대한 배경은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그저 시기상조로 믿었고 물가 안정과 기업 경쟁력 강화에 대통령의 관심이 쏠렸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그렇게 국민연금 도입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후에도 전두환 대통령은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1984년 1월 새로 부임한 안승철 KDI 원장과 서상목 부원장이 신임 인사차 청와대를 방문했다.

안 원장은 대통령에게 주요 정책과제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7대 정책 중 하나로 국민연금을 언급했다. 그런데 전 대통령은 "한국에서 이런 것을 하면 경제가 망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또 한 번의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하지만 실무진은 주기적으로 관계자 모임을 갖고 제도 도입을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정부는 1986년 1월 말 KDI에 연구 프로젝트를 발주했다. 이후 같은 해 4월 대통령 유럽 4개국 순방 귀국길에 결실을 맺게 된다.

예상외로 국민연금 도입은 전두환 정부 그 이전부터 도입이 검토됐던 복지 정책이다.

연금제도 도입을 주장한 국내 최초 보고서는 1968년 9월 1일 사회보장심의위원회에서 나왔다. 그러나 진지한 검토 없이 연구자 책장에서 수년씩 잠자게 됐다.

그러던 국민연금이 처음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비친 건 1973년 1월 12일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에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연금제도 도입을 기정사실화했다.

하지만 곧이어 발생한 제1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시기상조론이 고개를 들면서 깊은 침묵에 들어가야 했다. 이후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13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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