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의 후손들이 10대째 살고있는 103칸 명품고택

머니투데이 김유경 기자 2015.04.11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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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의 한옥 여행]<2-1>강원도 강릉시 '강릉선교장'

편집자주 지방관광과 한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옥체험 숙박시설이 2010년 이후 매년 150여곳씩 증가해 2014년12월 기준 964곳에 이른다. 한국관광공사는 2013년부터 우수 한옥체험숙박시설 인증제인 '한옥스테이'를 도입했다. 관광공사가 선정한 한옥스테이와 명품고택은 총 339곳. 이중에서도 빛나는 한옥스테이를 찾아 한옥여행을 떠나본다.

강릉선교장의 활래정. 1816년에 지어진 정자로 풍류를 즐겼던 조선의 시인묵객들이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즐기기 위해 이곳에 머물며 문화와 예술의 향기를 피웠다. /사진=김유경기자강릉선교장의 활래정. 1816년에 지어진 정자로 풍류를 즐겼던 조선의 시인묵객들이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즐기기 위해 이곳에 머물며 문화와 예술의 향기를 피웠다. /사진=김유경기자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벚꽃 꽃망울이 막 터지기 시작한 4월 초 주말, 강원도 강릉시 '강릉선교장'에선 이른 아침부터 난데없이 고어가 들린다. 수백 년 된 고택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고어가 절로 나오는 모양이다.

300년을 훌쩍 넘은 집이라지만 강릉선교장(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63)은 한국관광공사가 인증한 한옥스테이 중에서도 명품고택으로 꼽힌다. 특히 조선 왕가의 후손이 살고 있어 더욱 특별한 곳이다. 세종대왕의 둘째형인 효령대군의 18대손 이강백 관장 부부가 외별당에 거주하며 전체 선교장을 관리하고 있다.



이강백 관장은 "1960년 4·19 혁명 이전에는 30여 채의 한옥에 300여 명이 사는 마을이었다"며 "토지계획 당시 소작인들에게 논·밭을 분배해주고 지금은 우리 내외와 한 가구 정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선교장 둘레길에서 내려다본 강릉선교장 전경 /사진=김유경기자선교장 둘레길에서 내려다본 강릉선교장 전경 /사진=김유경기자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이 1703년에 건립한 조선후기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다. 당시 집 앞이 경포호수여서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녔다고 해서 선교(船橋;배다리), 의·식·주 모두 자체 해결할 수 있다 하여 장(莊; 장중할 장)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우리나라에서 '장'이 붙은 곳은 '선교장'과 이승만 대통령의 사저 '이화장', 백범 김구 선생이 살았던 '경교장' 등 3곳뿐이다.



선교장은 본채만 총 103칸으로 현존하는 전통 살림집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당시 위세 높은 양반이라도 99칸 이하로 규제했던 걸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외별당과 홍예헌, 박물관, 교육관, 가승음식체험관, 한국전통체험관 등까지 합하면 현재 총 280여 칸에 이른다.

관동팔경과 경포대를 유람하는 선비들의 숙소로 사용된 행랑채/사진=김유경기자관동팔경과 경포대를 유람하는 선비들의 숙소로 사용된 행랑채/사진=김유경기자
우물 옆으로 난 대문은 여성 출입문이다. 안을 바로 들여다볼수 없도록 내외벽이 있는 게 특징이다. /사진=김유경기자우물 옆으로 난 대문은 여성 출입문이다. 안을 바로 들여다볼수 없도록 내외벽이 있는 게 특징이다. /사진=김유경기자
집안일을 하던 집사들의 거처인 행랑채도 23칸으로 국내 주택 중 가장 길다. 도둑이 이 집의 긴 행랑을 빠져나가려면 재빠르게 줄달음질을 쳐야 해서 '줄행랑을 치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선교장을 보고 문화재로 지정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사람은 없겠지만 문화재 지정 이유가 행랑채 사이에 나있는 문 때문이란 걸 눈치 챌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김선미 해설사는 "선교장이 문화재로 지정된 두 가지 이유는 사랑채로 들어오는 문과 안채로 들어오는 문이 분리돼 있고 안채로 들어오는 문에 내외벽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긴 행랑채에는 같은 문이 두개 나있는데 솟을대문인 왼쪽 문이 남성이 사용하는 문이고, 우물이 앞에 있는 오른쪽 문이 여성이 사용하는 문이다. 특히 여성이 사용하는 문에는 안이 보이지 않도록 내외벽이 있는 게 특징이다.

1703년 선교장 최초로 지어진 안채주옥(왼쪽)과 딸들의 거처로 사용된 동별당(오른쪽)/사진=김유경기자1703년 선교장 최초로 지어진 안채주옥(왼쪽)과 딸들의 거처로 사용된 동별당(오른쪽)/사진=김유경기자
여성문으로 들어가면 가장 처음 지어져 원형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전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안채를 볼 수 있다. 식구가 늘고 주변 종친들과 함께 살게 되면서 동별당·서별당·외별당을 건축했고 가세가 늘어나 행랑채와 곳간채 등이 생기며 선교장의 규모가 커졌다. 곳간이 주문진에도 있었을 정도로 부를 일궈 한 때 선교장의 땅을 밟지 않으면 강원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1815년에 건립된 사랑채 '열화당'도 선교장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구한 말 러시아 공사관에서 받은 처마를 덧 달은 것이 인상적이다. 러시아 사람들이 국내 지적도 조사를 하며 머문 집들마다 이런 처마를 선물했으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을 의식해 대부분 철거했기 때문에 몇 남지 않은 역사의 현장이다. 열화당은 현재 작은 도서관으로 운영 중인데, 출판사 열화당도 이내번의 후손들이 설립한 것이다.

1815년에 지어진 선교장 종손의 거처 열화당 /사진=김유경기자1815년에 지어진 선교장 종손의 거처 열화당 /사진=김유경기자
이강백 관장이 거주하고 있는 외별당. 집안의 장자의 거처로 사용돼왔다. /사진=김유경기자이강백 관장이 거주하고 있는 외별당. 집안의 장자의 거처로 사용돼왔다. /사진=김유경기자
안채 외부에 있는 외별당은 집안의 장자 또는 분가하는 자녀들의 거처로 사용됐던 곳으로 지금도 그 후손이 거주하다 보니 관람객들의 출입이 유일하게 제한돼 있다. 대문 너머로 엿보니 그저 정갈하다. 오른쪽으로 40여 개의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네 줄로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게 눈에 띈다.

예부터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던 선교장은 지금도 한옥스테이로 개방해 전통문화체험관(본관)을 비롯한 △중사랑채 △연지당 △행랑채 △외별당 △홍예헌 1관 △홍예헌 2관 △초정 △초가 1관 △초가 2관 △서별당 총 10채의 건물(59칸) 32실을 내주고 있다. 본채에 있는 한옥 중 서별당과 초정은 6.25때 소실돼 복원한 것이지만 나머지는 100년 이상 된 한옥이다. 대부분 실내 욕실이 있으며, 취사가 가능한 곳도 있다.

강릉선교장 홍예헌 2관 실내/사진=김유경기자강릉선교장 홍예헌 2관 실내/사진=김유경기자
효령대군 18대 후손 이강백 관장/사진=김유경기자효령대군 18대 후손 이강백 관장/사진=김유경기자
선교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은 역시 활래정이다. 1816년에 창덕궁의 부용정을 본떠 만든 정자로 네모난 연못과 그 가운데 네모난 섬이 눈길을 끈다. 우주가 네모나다고 믿었던 당시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활래정의 현판은 당대 문인들의 글씨로 그 자리를 매번 달리 채웠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쓴 '홍엽산거(紅葉山居)'라는 현판이다. 활래정은 실제 보물로 지정될 예정이다.

가승 전통음식체험관에서는 300년 역사의 가승(家承)음식과 초당두부, 황태구이 등 강릉 향토음식을 아침과 저녁에 맛볼 수 있다. 조식이 7000원으로 저렴하다. 활래정에서는 전통차를 시음할 수 있다. 특히 여름철 연꽃이 만개했을 때 활래정의 모든 문을 위로 올려놓고 차를 마시면 신선이 따로 없단다. 예약은 필수다.

강릉선교장/사진=김유경기자강릉선교장/사진=김유경기자
☞강원 '강릉선교장' 여행팁

▶ 방 선택 방법 = 선교장에는 한옥스테이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총 10채인데, 이중 명품고택은 서별당과 연지당이다. 홍예헌은 손님 또는 가족들이 사용했던 곳으로 한 두 가족이 한 채를 통째로 쓰기에 좋다. 선교장 숙박비는 1박에 7만원부터이고 홍예헌은 25만~30만원.

▶ 주변관광지 = 오죽헌과 참소리·에디슨박물관, 벚꽃축제가 한창인 경포대 일원이 차로 5분 거리 내에 있고,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이 12분 거리에 있다. 안목해변 강릉커피거리도 20여 분이면 닿는다.
왕가의 후손들이 10대째 살고있는 103칸 명품고택
▶교통 = 동서울터미널과 강릉터미널을 오가는 직행버스가 오전 6시22분부터 오후 11시5분까지 하루 58회 운행한다. 소요시간은 2시간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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