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조선은 ‘성리학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었다. 사대부들은 이 시대를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불렀다. 목릉은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의 능호다. 하지만 오늘날 목릉성세는 퇴색했다. 선조도 못난 임금으로 전락했다.
선조는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임금이었다. 본인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서자였으니 조선의 법도로는 서자로 봐야 한다. 그는 원래 불우한 종친이었다. 할머니 창빈 안씨는 중종의 후궁이었는데 집안이 한미했다.
그가 이순신과 광해군 등을 의심하고 옥죈 이유가 여기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정통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니까, 왕위에 전전긍긍하며 자격지심에 의심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면 한양을 버리고 도망간 비겁함도 임금으로서의 자존감이 결여된 탓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선조의 부정적 이미지에 기댄 억측일 뿐이다. 언제까지 세간의 통념을 빌어 서자 출신 임금에게 어설픈 정신분석의 잣대를 들이댈 것인가? 더구나 그걸 빌미로 왜란을 방비하지 못하고 민생을 파탄시킨 책임을 선조에게만 전가하는 태도는 지나친 비약이다.
이 시각 인기 뉴스
발상을 바꿔보자. 선조 개인이 아닌 세력의 문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1567년 선조가 16세의 나이로 즉위할 무렵 조선에서는 훈척세력이 무너지고 신진사림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진다. 당시 신진사림은 사단칠정 논쟁과 이기논변을 거치며 관념적인 성리학에 몰입했다.
조선 건국 이래 통치이념으로 삼아온 성리학은 ‘경세(經世)’, 즉 나라를 다스리는 현실적인 측면을 중시했는데 이때 패러다임이 전환된 것이다. 신진사림은 조정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경륜을 쌓아온 기성사림마저 몰아내고 임금을 에워쌌다.
선조는 경세의 능력도, 정치적 경륜도 검증이 안 된 관념론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왕수업을 받았다. 이황은 고고한 인품과 드높은 학식을 갖췄지만 경세의 재주는 없다고 스스로 자인한 바 있다. 이이 역시 초년에는 경륜을 바탕으로 붕당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기성사림을 앞장서서 배척했다. 선조와 신진사림은 그렇게 위험한 동행을 시작했다.
신진사림은 무엇보다 군주의 수양을 강조했다. 성인군주가 다스리기만 하면 백성이 편안해진다는 것이었다. 또 신분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므로 분수를 지키며 살라고 설파했다. 천한 백성들은 죽어나가는데 현실적인 개혁은 뒷전이었다. 민생은 아랑곳 않고 공론으로 시비를 가리는 데 골몰했다.
붕당정치는 필연이었다. 선조 연간에 신진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세포분열을 거듭했다. 성인이 못 된 선조는 교활하게도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 이를 방치했다. 붕당은 서원과 향촌을 기반으로 세력 결집에 나섰다. 오늘날 망국병이라 일컬어지는 학연, 지연의 실질적 출발점이다.
역사 속의 사람을 바라볼 때 상대에 따라 달리 보이는 모습은 허상이다. 진상은 개인보다는 세력, 결과보다는 과정에 투영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 율곡 이이는 지난날을 반성하며 ‘부의(浮議 : 들뜬 논의)’의 폐해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
“정치는 부의 때문에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은 그 폐단으로 곤궁해진다”는 것이다. 선조와 신진사림이 추구한 성리학 유토피아가 바로 백성의 삶을 외면하고 사대부의 허영심을 채우는 들뜬 논의였다. 그들이 왜란과 민생파탄에 무기력했던 것도 이런 정치가 수십 년 간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