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선의 컬쳐 톡톡]가로등 밑의 수인

머니투데이 황인선 문화마케팅 평론가 2015.02.28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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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선의 컬쳐 톡톡]가로등 밑의 수인


한 아이가 집으로 가는 골목길 가로등 밑에서 뭔가를 찾는 남자를 만났다.
“ 아저씨, 무얼 찾으세요?”
“ 500원짜리 동전을 잃어버려 찾는 중이란다.”
아이가 남자를 도와 가로등 밑을 찾았지만 동전을 찾을 수 없었다.
“ 아저씨, 이 가로등 아래서 잊어버린 것 맞아요?”
“ 모르겠다.”
“ 그런데 왜 가로등 밑에서 찾아요?”
“ 그야 이 아래가 밝으니까 그렇지.”
“ 네?”

이 우화를 들으면 웃음이 나오는데 마냥 웃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어느 순간은 우리 자신도 그 남자의 모습을 보이니까. 아니 어느 순간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럴 것이다. 젊은이들이 취업에만 목을 매던 얼마 전까지의 상황이나 퇴직하면 마치 죽을 것처럼 생각하는 게 이 가로등 우화와 다를 게 없을 테니. 이러니 ‘가로등 밑의 수인(囚人)’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개인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그런 시기가 숱하게 있었다. 포르투갈 항해 왕자인 엔히크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대항해 시대는 유럽이라는 가로등 밑을 벗어나려는 시도였지만 콜럼버스가 자신이 발견한 땅을 평생 인도라고 믿었던 것이 대표적이다.

혹시 어느 날 문득 보름달이 휘영한 밤에 우리를 비추는 두 개의 불빛, 달과 가로등을 비교해 본 적 있는지? 보름달은 높이 떠서 세상을 비추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래서 ‘달아 노피곰 도다샤 / 어긔야 머리곰 비추오시라’ 같은 정읍사의 달 정서가 가능했다. 시장으로 간 남정네를 염려하는 마음이 달에 투사된 것이다. 달엔 치성을 드리고 이태백을 회상하고 인간을 넘어서는 옥토끼와 항아 선녀의 신화도 물론 담겨 있다. 그래서 달에 대한 정서는 이타적이고 아름답고 신화적이다.



그러나 현대로 들어와 가로등이 달 대신 나타났다. 달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 개인만으로 보면 당장 우리 머리 2-3미터 위에서 특정 공간을 환하게 비추는 가로등만큼은 환하지 않다. 달은 흐려서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가로등은 그렇지 않다. 항상 곁에 있어줄 것만 같은 연인처럼.

게다가 주위는 어두운데 나만 비추니 가로등은 천상 로맨틱하고 개인적인 불빛이다. 배호의 ‘삼각지 로터리’, 장덕과 진미령 이선희가 부른 ‘소녀와 가로등’, 김수희의 ‘못 잊겠어요’ 등 당대 최고 인기의 가수들이 부른 가로등 노래가 그렇다. 슬프고 내면 투시형이다. 달 타령 같은데서 발산되는 넓은 시야와 이타적 깊이가 나오질 않는다.

이를 앞에 우화 ‘가로등 밑의 수인’과 같이 놓고 보면, 가로등의 효용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점점 보편성으로서의 달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아마 남자가 찾던 동전은 가로등 불빛이 흐릿하게 비추는 떨어진 곳에 있었을 것이다. 달도 드넓은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우주의 가로등에 불과할 것이다. 보편의 세계는 그만큼 넓다.


이제 막 설이 지났다. 새해 새달 첫날을 설이라고 하는데 이제 한 살 더 먹었으니 ‘가로등 밑의 수인’을 벗어나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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