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장그래' 아마 6단 김 대리 만나보니…

머니투데이 박계현 기자 2014.11.29 06:00
글자크기

"회사는 바둑판…'두터운 실리형' 바둑 두겠다"...회계학원 다니고 영어공부하고

현실의 '장그래' 아마 6단 김 대리 만나보니…


"제 기풍은 '두터운 실리형'입니다. 이창호 9단처럼 차분하게 길게 끌고 가면서 승부를 보는 스타일입니다."

중견기업 SG세계물산 (408원 ▼4 -0.97%)에는 웹툰·드라마로 화제가 되고 있는 '미생' 주인공 '장그래'와 똑 닮은 인생을 살아가는 현실의 장그래가 있다. 2010년 이 회사에 입사한 김준상(32세) 재경팀 대리(아마6단)가 그 주인공이다.

김 대리의 삶은 웹툰·드라마속에 나오는 '장그래'의 인생경로를 그대로 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등학교 3학년 처음 바둑을 접한 그는 5학년 때 지방대회에서 우승하며 서울로 올라와 한국기원 연구생이 됐다.



부모님은 그제야 아들이 고생스런 길로 들어가는 걸 알고 말리셨지만 이미 승부의 맛을 본 그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막상 서울에 올라와 보니 그런 고집을 부린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잠자는 시간,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바둑만 생각하고, 잘 때도 바둑판을 안고 자는 사람들의 무리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김준상 SG세계물산 대리/사진제공=SG세계물산김준상 SG세계물산 대리/사진제공=SG세계물산
김 대리는 바둑 명문인 서울 충암중·고교를 진학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바둑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한국기원 사범들도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사실 프로 바둑기사의 문은 아주 좁다. 김 대리가 프로 기사에 도전하던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1년에 입단할 수 있는 프로기사 정원은 6명 정도였다. 지금도 고작 3~4명 정도 늘어난 상황이다. 한국기원에 소속된 100명의 연구생들은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리그전을 거쳐 1~10조로 구성되고 입단자는 보통 1조에서 나온다.



김 대리는 매번 안타깝게 프로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한국기원을 나와서도 2년간 도전했지만, 계속 고배를 마셔야했고, 어느덧 나이는 스물두살이 됐다. 군에 입대하면서 김 대리는 인생의 전부였던 프로바둑기사의 꿈을 접어야했다. 하지만 군 제대 후 명지대 바둑학과에 입학하면서 바둑과의 연은 이어졌다.

그를 일반회사 취업으로 이끌어준 주인공은 유창혁 9단이다. 그는 대학시절 유 9단이 경기 분당에서 운영하던 기원에서 바둑지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봤던 유 9단은 졸업을 앞둔 그에게 일반기업 취업의향을 물었고, 바둑계의 유명한 후원자 중 한 사람인 이의범 SG그룹 회장에 그를 추천했다. 이 회장은 그를 만나본 뒤 바로 채용을 결정했다.

아마 5단인 이 회장은 입사 초기 그를 불러 대국을 하기도 했다. 김 대리는 입사 직후엔 재경팀에서 월급통장관리 등 잡일을 도맡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은 매출 3000억원이 넘는 회사에서 수출 관련 회계·세무 업무를 해나가는 살림꾼이 됐다.


김 대리는 '장그래'와 달리 바둑 얘기를 떳떳하게 했다. 그에게 '바둑'은 상처로만 남진 않았다. 그는 오히려 "후회가 남지 않을 정도로 해봤기 때문에 지나고 나니 바둑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사실 프로기사가 됐더라도 승부로만 먹고 사는 기사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프로기사가 된 친구 중엔 오히려 그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웃으며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바둑을 하면서 그가 배운 것은 오래 승부할 수 있는 근성과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다. 어려서부터 패배·실패를 밥 먹듯이 겪으면서 그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 생겼다고 했다. 또 항상 다른 사람의 수를 읽는 바둑을 통해 타인의 눈으로 생각하고 배려하는 습관을 익혔다.

김 대리는 "바둑에선 어려운 상황에 빠지면 한 번에 묘수를 찾기보다는 최악의 수를 하나하나 지워 나가다 보면 최선의 수가 보이는 경우가 많다"며 "업무에서 막막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고는 한다"고 말했다.

승부의 세계에서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그에겐 '그만의 바둑'이 남아 있다. 김 대리는 "연구생 시절에는 다음달 리그전, 입단대회 등 항상 목표가 있었고 노선이 정해져 있어서 거기에 맞춰 달리기만 하면 됐다"며 "지금은 내가 선택해서 달려야 하니 그게 어려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주변엔 여전히 바둑계에 몸담고 있는 친구가 많지만 30대 초반이 되면서 여전히 바둑판을 잡고 사는 친구나 그렇지 않은 친구나 고민은 비슷해졌다고 한다. 현재 그 앞에 놓인 바둑판은 '회사'다.

그는 자신의 기풍에 맞게 여전히 회계 관련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을 다니고 영어공부를 한다. 김 대리는 "아직 부서에서도 배울 것이 너무 많다"며 "준비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