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윤태호 작가가 직접 꼽은 '명장면 BEST 5'

머니투데이 김하늬 기자 2014.10.2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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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호, "웹툰 속 대사를 통해 독자들에게 대화를 걸었다"

웹툰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 작가(왼쪽)가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 '장그래' 역할을 맡은 탤런트 임시완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윤태호웹툰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 작가(왼쪽)가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 '장그래' 역할을 맡은 탤런트 임시완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윤태호


웹툰 '미생'이 다시 화제다. 드라마 '미생'이 방영되면서 다시금 직장인들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있어서다. 단행본 '미생'도 100만부 판매를 목전에 두고 있다.

웹툰 '미생'에는 수십만장의 책갈피가 꽂혀 있다. 독자들이 각자 기억속에 책길피처럼 새겨진 최고의 장면과 먹먹했던 순간들을 몇번씩 다시 찾아보기 때문이다. '미생'이 145화까지 연재되면서 에피소드마다 6000개 이상의 댓글이 달렸다.



독자들은 만화 속 누구가의 상황과 고민에 자신을 투영했다. 어떤 때는 주인공 장그래가 되고, 또 어떤 때는 김 대리나 오차장이 되곤 했다. 미생의 원작자인 윤태호 작가는 "누군가에게는 현실적인, 누군가에는 판타지 같다는 말을 들었다"며 "미생을 만들며 우리 시대에 함께 기억되는 작품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윤 작가가 직접 웹툰 '미생'의 명장면 5개를 꼽았다. 사회 초년생 장그래가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배우는 보고서 작성 에피소드부터 타인의 결정을 지켜주며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 회사 내 현장직과 사무직의 갈등, 그리고 오랜 사회생활 끝에 임원을 달았을 때 짊어지게 되는 커다란 권한과 책임의 경계까지. 각 에피소드 속에 녹아있는 '사람'들은 항상 합리적인 동시에 서로에게 취약하다. 그래서 우리와 더 닮아있다.



◇①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미생 20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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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훈 9단의 말이다. 윤 작가는 "홀로 바둑을 두며 나의 '수'와 상대방의 '수'를 고민해오던 장그래가 옆 팀 박대리를 위하는 마음에 훈수를 두려다 바둑판보다 더 큰 세상을 깨닫는 장면"이라고 말한다.

윤 작가는 "길에서 보는 흔한 아저씨같은 분들도 제각기 회사에서 자신만의 관점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이런 보통의 사람들이 하나쯤은 가진 노하우가 모여 회사를 지탱하는 힘이 되는 거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누군가 실수를 하거나 조금 뒤떨어져 보이는 동료가 있다 해도, 그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②"사무실의 이 현장도, 공장의 현장과 다를 바 없습니다."(미생 32수)
'미생' 윤태호 작가가 직접 꼽은 '명장면 BEST 5'
'미생' 윤태호 작가가 직접 꼽은 '명장면 BEST 5'
윤 작가는 회사생활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가 미생을 시작하기 전까지 직장인들이 매일 아침 회사에 출근 해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다시 일을 하고 야근까지 하는지 몰랐던 것도 이 때문이다.


미생을 준비하며 윤 작가는 현재 대기업 종합상사에 근무하는 직원 두 명에게 전적으로 '의지' 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가방과 외투는 어디에 두는지. 인사는 부장에게만 하는지 대리, 과장, 차장에게 일일이 돌아다니며 다 하는지. 자리에 컴퓨터는 켜져있는지 꺼져있는지. 컴퓨터를 켜면 뭘 먼저 하는지. 이메일에 접속하는 지 메신저에 접속하는지. 이 과정에서 윤 작가는 "생산 현장 못지 않게 치열한 사무실 '현장'을 알게 됐다"고 전한다.

◇③"보고서는 자신이 먼저 설득돼 있어야 한다" (미생 39수)
'미생' 윤태호 작가가 직접 꼽은 '명장면 BEST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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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들은 대부분 "힘들다"고 말한다. 윤 작가는 늘 되묻는다. "어떤 점이 힘들어요?" 일이 많아서 힘들고, 이 일을 왜 하고 있나 싶은 생각에 지겹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이게 아닌데 싶어 답답하고, 직장상사가 날 괴롭히는 것 같아 서글프고 등 다양한 대답이 돌아왔다.

회사원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가장 많이 버려지는 보고서에 윤 작가는 바둑의 한 수와 같은 철학을 담았다. 윤 작가는 "배운 대로 따른 것일 뿐, 위에서 시켜서, 최근 트렌드라서, 이렇게 두는 한 수는 결국 이기거나 지고도 '찜찜'한 상태가 된다"며 "직장인들의 보고서와 기획서도 완벽한 숫자와 모양새를 갖춘다 해도 그 안에 나의 생각이 담기지 않는다면 '허수'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윤 작가는 '날 설득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미생 이전에, 만화가로서 자신이 항상 품고 있는 고민이라고도 말했다. 그는 "내 만화를 보맨 나는 재미있나? 내 스토리가 나를 제일 만족시키고 있는가?"의 질문을 항상 던진다고 말했다.

◇④"자아실현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아가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곧 자아의 실현이 된다. (미생 13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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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작가는 이 장면에 대해 "대사를 통해 독자들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고 말했다. 웹툰에 달린 댓글 중 일부는 회의적인 내용도 있었다. "회사에 누가 자아실현하러 가나. 돈 벌러 가지. " 이처럼 미생이 직장생활을 미화하는 것 아니냐는 내용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윤 작가는 "회사에 돈 벌러 가는 게 맞다. 그런데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회사에서 과연 자아를 온전히 버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많이 했다" 며 "정말 일만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자기 자아를 버리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공감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독자들에게 저 대사를 통해 손을 내밀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회사 생활에 비관적이거나 회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최소한 자아실현은 아니라도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 다들 열심히 살고 있지요"라며 "소극적 의미의 자아 실현이라고 믿어요"라는 작은 위로와 공감의 말을 오차장의 입을 빌어 전달한 셈이다.

웹툰 속 오 차장은 "눈에 띄지 않는 일이라도 맡겨진 일은 제대로 끝내려 했다. 승진을 위해 누구의 뒤에 서 본 적 없다. 오히려 누군가의 뒷덜미를 잡아 쓰러뜨렸다. 회사의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기 매우 어려우나, 자아가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자아의 실현이 된다."고 말한다. 전무가 직접 지시한 중국 프로젝트를 맡은 영업3팀의 오차장은 직감적으로 '이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한 번만 눈감고 지나가면 동기보다 밀린 부장 승진, 인센티브, 장그래의 정규직 전환 등의 '댓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쉽지 않은 고민을 껴안은 오차장의 독백 대사다.

윤 작가는 오 차장의 독백을 빌어 매 순간 시스템 안에서 쉽지 않은 선택에 직면하는 직장인들의 고뇌를 담담히 그렸다. 윤 작가는 "어떤 선택도 잘한 것 잘못한 것은 없다"며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많은 고민과 선택지는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사회를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능력이자 체력이 되어줄 것으로 생각하길 바랐다"고 말했다.

◇⑤)거인 임원 (미생 136수)
'미생' 윤태호 작가가 직접 꼽은 '명장면 BEST 5'
이 대사는 윤 작가가 모든 직장인들에 보내는 일종의 긍정의 메시지다.

윤 작가는 "미생을 도와주던 한 '상사맨'에게 6시간 넘게 임원은 무엇인지, 어떻게 임원까지 올라가고,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며 "이야기 끝에 그 직원이 갑자기 '슬프다'는 말을 했다"고 말했다.

그 20대의 젊은 상사맨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을 하다보니 직장인으로서 마음에 품었던 '임원의 꿈'이 앙상하게만 느껴졌다고 한다. 입사 후 막연히 '승진하고 임원까지 돼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제 3자에게 '임원이 되는 길'을 현실감 있게 풀어놓다 보니 자신의 꿈이 하찮게 여겨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윤 작가는 "직장인으로서 그 생각은 결코 초라하거나 슬픈 게 아니라는 이야길 전하고 싶었다"며 "임원은 단지 승진의 결과가 아니라 그러면서 함께 성장하는 거인이라는 걸, 땅에 발을 딛고 높이를 키워 저 멀리 반짝이는 별도 보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음 날 웹툰이 온라인에 연재된 후 그 상사맨으로부터 '감사합니다'는 문자를 받고 윤 작가는 딱딱했던 가슴이 풀리며 뭉클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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