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6년차' 서울 토박이, 회사따라 진주 내려갔더니…

머니투데이 전병윤 기자 2014.08.24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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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딩블루스 시즌2 "들어라 ⊙⊙들아"]공공기관 지방이전의 애환

편집자주 '⊙⊙'에 들어갈 말은, '상사'일수도 있고 '회사'일수도 있습니다. 물론, 선배 후배 동료 들도 됩니다. 언젠가는 한번 소리높여 외치고 싶었던 직장인들의 이야기를 독백형식을 빌어 소개합니다. 듣는 사람들의 두 눈이 ⊙⊙ 똥그래지도록 솔직한 이야기를 담아봅니다.

나는 오늘도 자기 체면을 걸듯 중얼거린다. "아 이 상쾌한 공기, 그래 난 전원생활을 꿈꿨잖아. 주변에 괜찮은 땅 있으면 멋진 집도 짓고 그렇게 사는거야. 얼마나 행복해……."

내가 다니는 회사는 공공기관 지방이전 계획에 맞춰 경남의 한 도시 외곽으로 내려왔다. 그렇다. 난 '신의 직장'이라는 공기업에 다닌다. 입사 6년차 대리다. 부모님은 공기업에 떡 하니 붙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당시 친구들의 부러움도 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방 균형발전이란 정부 정책에 맞춰 내가 다니는 회사도 지방으로 내려갈 것이라 했다. 청천벽력이었다. 처음엔 그날이 올까 했다. 시간은 흘렀고 나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 결혼도 해야 하는 노총각이라 마음이 복잡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했다.

마침내 지난달 부랴부랴 짐을 싸들고 내려왔다. 당장은 합숙용 아파트에 동료들과 함께 산다. '내무생활'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 토박이인 나로선 이곳이 무척 낯설기만 하다. 자기 체면의 효과는 오래가지 않는다. "어서 오이소" 경상도 사투리로 손님을 맞는 수퍼마켓 주인 아주머니는 오늘도 나를 이방인 보는 듯하다. 전형적 'A'형 성격인 나로선 이곳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하다.



이곳이 고향이라는 김 과장이 부럽다. 부인도 동향이다. 그는 서울 전셋집을 빼 가족 모두 내려와 넓직한 아파트를 장만했다. 부모님도 근처 어디에 사신다고 하고, 저녁이면 '금의환향'한 자신을 대접하겠다는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적지 않다. 김 과장은 어디 냉면집이 맛있다는 둥 동네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다. 예전과 다르게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 운동에 무관심했던 그는 요즘엔 뱃살을 빼겠다며 아침마다 뛴다고 한다. 살도 빠진 듯 하고 얼굴빛도 환해졌다. 내가 알던 김 과장인가 싶다. 그는 마치 우리 회사가 먼 훗날 이곳으로 내려올 것이란 사실을 간파했던 것 같기도 하다.

같은 아파트에서 합숙중인 '고참'은 속도 모르고 아침마다 풀벌레 소리에 잠을 깨니 상쾌하다고 흐뭇해한다. 10층에 살면서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니. 그는 서울에 가족을 두고 내려온 기러기 아빠다. 아빠로서의 삶에 시달렸던 탓일까. 이곳에 온 뒤로 '회춘'한 듯 왠지 전보다 들떠 보인다.

요즘들어 옛 생각이 부쩍 난다. '난 원래 화가를 꿈꿨는데…….' 순환 보직이 있긴 하다. 3년 후 서울 경기 지역본부에 신청하려는 잠재 수요는 이미 공급량을 초과했다. 경쟁률이 높아 쉽지 않은 게임이다. 모아둔 돈도 변변치 않은 나. 지방에 내려온 뒤로 간혹 있던 소개팅마저 끊겼다. 서울 여자는 포기해야겠다.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 필요하다. 그동안 내심 거리를 뒀던 김 과장에게 잘 보여야겠다.


금요일 오후. 오늘도 어김없이 서울행 고속버스를 탄다. 일요일 밤 되돌아오는 버스를 타면 군대 시절 휴가 복귀하던 느낌마저 든다. 이러다 설마 '관심사병'이라도 되는 건 아닐까.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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