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회사는 공공기관 지방이전 계획에 맞춰 경남의 한 도시 외곽으로 내려왔다. 그렇다. 난 '신의 직장'이라는 공기업에 다닌다. 입사 6년차 대리다. 부모님은 공기업에 떡 하니 붙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당시 친구들의 부러움도 샀다.
마침내 지난달 부랴부랴 짐을 싸들고 내려왔다. 당장은 합숙용 아파트에 동료들과 함께 산다. '내무생활'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 토박이인 나로선 이곳이 무척 낯설기만 하다. 자기 체면의 효과는 오래가지 않는다. "어서 오이소" 경상도 사투리로 손님을 맞는 수퍼마켓 주인 아주머니는 오늘도 나를 이방인 보는 듯하다. 전형적 'A'형 성격인 나로선 이곳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하다.
같은 아파트에서 합숙중인 '고참'은 속도 모르고 아침마다 풀벌레 소리에 잠을 깨니 상쾌하다고 흐뭇해한다. 10층에 살면서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니. 그는 서울에 가족을 두고 내려온 기러기 아빠다. 아빠로서의 삶에 시달렸던 탓일까. 이곳에 온 뒤로 '회춘'한 듯 왠지 전보다 들떠 보인다.
요즘들어 옛 생각이 부쩍 난다. '난 원래 화가를 꿈꿨는데…….' 순환 보직이 있긴 하다. 3년 후 서울 경기 지역본부에 신청하려는 잠재 수요는 이미 공급량을 초과했다. 경쟁률이 높아 쉽지 않은 게임이다. 모아둔 돈도 변변치 않은 나. 지방에 내려온 뒤로 간혹 있던 소개팅마저 끊겼다. 서울 여자는 포기해야겠다.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 필요하다. 그동안 내심 거리를 뒀던 김 과장에게 잘 보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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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오늘도 어김없이 서울행 고속버스를 탄다. 일요일 밤 되돌아오는 버스를 타면 군대 시절 휴가 복귀하던 느낌마저 든다. 이러다 설마 '관심사병'이라도 되는 건 아닐까.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