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호러' 영화 전성시대…'해머 필름' 이야기

딱TV 김준만 2014.08.20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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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TV]할리우드의 고전…'고딕 호러' 탐방

편집자주 '밀리터리 덕후' 김준만 - 할리우드 영화와 록 음악에 푹 빠져 사는 ‘피터팬 증후군’ 중증 환자입니다. 밀리터리와 영화 관련 글을 인터넷 공간에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것이 樂입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사루만 역으로 잘 알려진 '크리스토퍼 리', 그가 과거엔 사각머리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었다는 사실을 혹시 아시나요? 지금은 다소 유치해 보이는 한 추억 속의 그 영화, '고딕 호러' 장르로 영화계를 주름 잡은 '해머 필름'의 작품 세계로 떠나 봅니다.

↑ 크리스토퍼 리는 1950~60년대 드라큘라 전문 배우로 영화팬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스타입니다.↑ 크리스토퍼 리는 1950~60년대 드라큘라 전문 배우로 영화팬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스타입니다.


'고딕(Gothic) 소설'이란?



소설의 장르 중에 '고딕 소설'이라는 독특한 장르가 있습니다. '공포소설'이라고도 부르며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영국에서 유행했는데요. 중세 고딕풍의 저택과 성, 사원, 수도원 등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초자연적이고 괴기(怪奇)한 이야기를 주로 다룹니다.

영화에서는 '고딕 호러 영화(Gothic Horror Movie)' 장르가 있습니다. 음침한 고성(古城)이나 고색창연한 저택을 배경으로 드라큘라 백작(Count Dracula), 프랑켄슈타인의 괴물(The Creature), 늑대 인간 등 고전 공포 영화의 대표적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이죠.



1970년대 '13일의 금요일'(Friday the 13th) 시리즈의 제이슨(Jason Voorhees), '나이트메어'(A Nightmare on Elm Street) 시리즈의 프레디(Freddy Krueger),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 (The Texas Chainsaw Massacre) 시리즈의 레더페이스(Leatherface)와 같은 새로운 캐릭터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고딕 호러 영화의 캐릭터들은 여름 극장가의 단골 주인공들이었습니다.

이런 고전적인 공포영화 주인공이 영화팬들에게 사랑받기 시작한 계기는 1920년대 무성영화 시대에 론 체이니(Lon Chaney, 1883~1930)가 노트르담의 꼽추(The Hunchback of Notre Dame, 1923)와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 1925)으로 크게 성공하면서 부터라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1930~40년대 흑백 유성 영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벨라 루고시(드라큘라), 보리스 칼로프(프랑켄슈타인)로 대표되는 유니버설 영화사의 공포영화들을 보면서 관객은 검은 망토를 두른 흡혈귀 백작과 사각형 머리의 거인에 열광했습니다.


△ '프랑켄슈타인의 신부(Bride of Frankenstein, 1935)' 중 보리스 칼로프



경영난에 허덕이던 영국의 무명 영화사 '해머 필름(Hammer Film Productions)'은 1950년대 몇 편의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그 중 라디오 스릴러 드라마를 영화화한 작품이 뜻밖에 성공을 거두자 '공포영화'가 돈이 되리라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전력투구하기로 정했죠.

가장 큰 영화시장인 미국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고전적인 공포 캐릭터들을 영화에 등장시키고, 미국 메이저 영화사들이 이 영화들을 시장에 배급했습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해머 필름의 고딕 호러 영화는 연속적으로 히트해 1970년대 초반까지 영국과 미국 시장에서 영화팬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해머 필름'…그들의 성공 요인은?

첫째, 공포 캐릭터에 아주 잘 어울리는 명배우들이 있었습니다.

↑ 크리스토퍼 리의 '드라큘라'↑ 크리스토퍼 리의 '드라큘라'
크리스토퍼 리(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피터 쿠싱(반 헬싱, 프랑켄슈타인 남작)등 주연급 배우들이 흥행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또, 작품마다 어김없이 등장해 괴물이나 흡혈귀 앞에서 비명을 질러댄 수많은 미녀 배우들도 영화 흥행에 한 몫 했죠.

↑ 해머 필름의 대표 캐릭터,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해머 필름의 대표 캐릭터,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둘째, 관객의 욕구를 확실히 알았던 감독들과 시나리오 작가들의 역량입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해머 필름의 전성기를 가능케 해준 것은 바로 감독들과 시나리오 작가들입니다. 끊임없이 찍어내는 저예산 호러 영화는 당시 영화팬에게 훌륭한 피서 수단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속편의 양산 행태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 '드라큘라 - 어둠의 왕자' 예고편 - 해머 필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셋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색감과 특수효과(?)입니다. 밝은색 핏빛으로 얼룩진 해머 필름 특유의 표현 기법은 관객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전까지 공포 영화에서 피(blood)의 표현은 매우 소극적이었고 흑백 톤으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해머 필름은 컬러 영화의 효과를 200% 살려 밝은색의 핏빛을 과감하게 보여줬습니다. 물론 21세기에 쏟아져 나오는 슬래셔 무비(Slasher Movie)에서 볼 수 있는 잔인하고 끔찍한 수준에 비하면 무척 점잖은(?) 정도지만, 당시 관객들에게는 경악을 금치 못할 장면이었습니다.

1.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해머 필름이 본격적으로 고딕 호러 영화에서 성공한 작품은 '프랑켄슈타인의 저주(The Curse of Frankenstein, 1957)'였습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피터 쿠싱이, 그리고 괴물은 크리스토퍼 리가 분했습니다.

여류 소설가 마크 셸리의 1818년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만들어진 유니버설픽처스의 프랑켄슈타인 영화들과 거의 같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차별화를 위해 기존의 사각형 머리의 다소 우스꽝스러웠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새로운 괴물 분장을 시도했습니다.

△ 크리스토퍼 리와 피터 쿠싱



반 헬싱역에 피터 쿠싱은 캐스팅 당시에 이미 영국 TV 드라마 출연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배우였습니다. 반면에 괴물역을 맡았던 크리스토퍼 리는 무명에 가까운 배우였습니다. 그는 연기력보다 2m에 가까운 큰 키로 득을 봤습니다. 1930년대 흑백 영화의 성공을 다시 이어갈지 귀추가 주목되던 이 영화는 영국과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뒀고, 당시 가치로 27만달러였던 제작비의 약 70배에 가까운 수익을 올렸습니다.

해머 필름의 프랑켄슈타인 영화는 1974년까지 무려 7편이 만들어졌습니다.

1) 프랑켄슈타인의 저주 (The Curse of Frankenstein, 1957)
2) 프랑켄슈타인의 복수 (The Revenge of Frankenstein, 1958)
3) 더 이블 오브 프랑켄슈타인 (The Evil of Frankenstein, 1964)
4) 프랑켄슈타인 여자를 만들다 (Frankenstein Created Woman, 1967)
5) 프랑켄슈타인 죽이기 (Frankenstein Must Be Destroyed, 1969)
6) 프랑켄슈타인의 공포(The Horror of Frankenstein, 1970)
7) 프랑켄슈타인과 지옥에서 온 괴물 (Frankenstein and the Monster from Hell, 1974)

그중에서 6번째 편만 제외하고 피터 쿠싱이 프랑켄슈타인 남작역으로 출연했습니다. 여기서 해머 필름은 전작과 연결성 자체를 아예 포기하고 돈벌이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1편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갔던 피터 쿠싱이 2편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3편에서 남작은 괴물과 함께 불 속에서 죽었는데 4편에서 또 다시 등장합니다. (전편에서 죽은 남작이 왜 다시 등장하는지 성의있는 설명조차 없습니다) 지금 같으면 이런 무성의한 속편 시나리오에 영화팬들은 난리를 치지만, 그 당시에는 무덤덤하게 넘어갔습니다.

↑ 해머 필름이 제작한 영화 '배스커빌가의 개(The Hound Of The Baskervilles, 1959)' - 피터 쿠싱이 홈즈 역을 맡았고. 크리스토퍼 리도 조연으로 출연했습니다.↑ 해머 필름이 제작한 영화 '배스커빌가의 개(The Hound Of The Baskervilles, 1959)' - 피터 쿠싱이 홈즈 역을 맡았고. 크리스토퍼 리도 조연으로 출연했습니다.
2. 드라큘라 백작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에 캐스팅된 크리스토퍼 리는 뜻밖의 흥행 성공으로 순식간에 해머 필름에서 매우 중요한 스타의 자리를 굳혔습니다. 이런 스타를 제대로 된 대사 한마디 없는 괴물 역으로 썩힐 수 없다고 판단한 해머 필름은 크리스토퍼 리를 야심차게 시작하는 드라큘라 영화에 주연으로 기용했습니다. 해머 필름은 흡혈귀 백작이 등장하는 '드라큘라'는 유혈이 낭자한 연출을 시도할 좋은 기회였죠.

1958년 최초로 제작된 '드라큘라(Dracula)'는 1957년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보다 더 큰 성공을 거뒀고, 해머 필름은 다시 한 번 돈방석에 앉게 됐습니다. 해머 필름은 당연히 속편 제작을 서둘렀죠. 드라큘라 시리즈는 프랑켄슈타인 시리즈보다 한 술 더 떠서 무려 8편의 속편이 1974년까지 제작됐습니다.

특히 드라큘라 영화는 에로틱한 연출이 가능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영화에서 드라큘라는 왠지 성적으로도 매우 강할 것 같은 인상입니다. 바로 드라큘라의 주위를 맴도는 섹시한 흡혈귀 미녀들 때문인데요. 포마드로 말끔하게 '올백'으로 넘기고, 검은 정장과 망토를 걸친 백작의 외모 또한 매력적입니다. 두 개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섹시한 미녀의 흰 목덜미에 갖다 대는 순간, 극장 안은 여성 관객들의 비명과 한숨이 뒤섞여버렸습니다.

1) 드라큘라 (Dracula, 1958)
2) 드라큘라의 신부 (The Brides of Dracula, 1960)
3) 드라큘라 - 어둠의 왕자 (Dracula: Prince of Darkness, 1966)
4) 무덤에서 일어난 드라큘라 (Dracula Has Risen from the Grave, 1968)
5) 드라큘라 피의 맛 (Taste the Blood of Dracula, 1969)
6) 드라큘라의 흉터 (Scars of Dracula, 1970)
7) 돌아온 드라큘라 (Dracula AD 1972, 1972)
8) 드라큘라 백작과 그의 뱀파이어 신부 (The Satanic Rites of Dracula, 1973)
9) 더 레전드 오브 더 7골든 뱀파이어즈 (The Legend of the 7 Golden Vampires, 1974)

드라큘라 영화 역시 첫 작품은 1897년 브람 스토커 원작의 동명의 소설을 충실히 재현했습니다. 영화에서 반 헬싱과 드라큘라는 격투를 벌이다가 헬싱 교수가 찢은 커튼 사이로 비친 햇살로 인해 드라큘라는 한 줌의 재가 됩니다.

서둘러 만든 2편에서는 반 헬싱역의 피터 쿠싱은 출연하지만 크리스토퍼 리는 출연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미녀 흡혈귀들과 반 헬싱 교수의 대결을 그립니다. 3편에서는 무려 8년 전에 공개됐던 1편의 헬싱이 드라큘라를 죽이는 장면에서 시작해, 한 줌 재가 됐던 드라큘라는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1편에서 재가 돼버린 드라큘라가 3편에서 왜 다시 살아나야 하는지 설명이 힘들다는 점을 고려했던 걸까요? 3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드라큘라는 물속에 가라앉으면서 끝납니다. (하지만 관객들 모두 이 정도로 드라큘라가 절대 죽지 않고, 속편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겠죠)

4편은 드라큘라가 금발 미녀들과의 '흡혈 행각(?)'을 마음껏 보여줍니다. 그리고 반 헬싱 교수 대신 신부의 기도로 재로 변해버립니다. 5편은 난데없이 해머 필름 창업주의 아들인 앤서니 하인즈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사실 시나리오는 원래 드라큘라의 등장이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으로 쓰였습니다. 크리스토퍼 리도 더는 드라큘라 역을 맡고 싶지 않았고 다른 영화에서보다 연기의 폭을 넓히고 싶어했습니다.

문제는 이 영화를 미국에서 배급할 워너 브러더스가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리가 빠지면 배급을 하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시나리오를 고쳤습니다. 미국 배급사의 요구에 영화제작이 산으로 가게 되면서, 경영진 중 하나였던 앤서니 하인즈는 급하게 직접 시나리오를 쓸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그는 6편까지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드라큘라역을 맡기 싫어했던 크리스토퍼 리는 결국 8편까지 드라큘라역으로 출연했고, 해머 필름 최대의 괴작(?)으로 꼽히는 9편에서 존 로버트슨이라는 무명의 영국 배우에게 드라큘라 역을 넘겨줬습니다. 한편 크리스토퍼 리는 007시리즈 9번째 작품인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The Man with the Golden Gun, 1974)'에서 제임스 본드(로저 무어)와 결투를 벌이는 최강의 살인자 스카라망가로 출연합니다. 후에 크리스토퍼 리는 007시리즈에서 가장 인상적인 악당 중의 한 명으로 평가받았습니다.

↑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 출연한 크리스토퍼 리↑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 출연한 크리스토퍼 리
해머 필름의 드라큘라 영화는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더는 흥행 보증수표가 되지 못했습니다. 날림식 속편 제작으로 관객들이 급속하게 외면했죠.

3. 그 외에 해머 필름의 캐릭터들

↑ 해머 필름 제작 '미라의 복수'↑ 해머 필름 제작 '미라의 복수'
해머 필름은 과거 유니버설픽처스에서 1930년대 고딕 호러 영화 전성기를 구가할 때, 드라큘라·프랑켄슈타인·늑대인간과 함께 유명했던 '미라'를 1959년에 영화화했습니다. '미라의 복수(Mummy, 1959)'는 피터 쿠싱과 크리스토퍼 리 모두 출연했고, 비평가의 호평과 함께 흥행에도 성공했습니다. 이후 미라를 소재로 한 3편의 영화가 1970년대 초반까지 만들어졌습니다. 각각은 1959년 작과 연계성을 유지하지 않고 독립적인 이야기로 만들어졌습니다.

해머 필름이 무분별하게 양산했던 고딕 호러 영화들은 1960년대 중반까지 팬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싸구려 호러 영화를 보며 애인에게 수작을 걸려는 청소년들이나 30년대 고딕 호러 영화의 추억을 못 잊었던 올드 팬들에게 말이죠. 해머 필름은 미국에서 1950년대 중반에 설립된 또 하나의 호러 영화 전문 제작사인 AIP(American International Pictures)와 경쟁을 벌이면서 1960년대 고딕 호러 영화 전성시대를 누렸습니다.

↑ 1973년 작 '엑소시스트'는 할리우드 공포 영화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한 명작입니다.↑ 1973년 작 '엑소시스트'는 할리우드 공포 영화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한 명작입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서면서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습니다. 1968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악마의 씨(Rosemary’s Baby)'는 오컬트 무비의 시작을 예고했고, 1973년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은 '엑소시스트(The Exorcist)'를 가지고 할리우드 영화 역사상 최초로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후보에 오르는 공포 영화감독이 됐습니다.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엑소시스트는 무려 10개 부문의 후보 지명됐고, 그중 각색과 음향 편집부문에서 수상했습니다. 공포 영화도 작품성과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따지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끝없이 복사해대는 고딕 호러 영화의 종착역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1975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조스(Jaws)'와 1976년에 리차드 도너 감독의 '오멘(The Omen)'은 공포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해머 필름의 1970년대 초반 영화들을 보면 이런 시대적인 흐름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여전히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을 내놓고 있었고, 더 이상의 경쟁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해머 필름은 2010년에 '렛 미 인(Let Me In)'이라는 흡혈귀를 소재로 했지만, 매우 섬세한 스토리 텔링의 로맨틱 호러 무비 한편을 들고 나타납니다. 2011년에는 힐러리 스왱크가 출연한 '레지던트(The Resident)'를 제작했습니다. 해머 필름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공포 영화의 새로운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976년 이후 해머 필름 영화에 출연하지 않던 크리스토퍼 리가 이 영화에 등장했습니다.)

△ '렛 미 인' 예고편



요즘 영화 기준으로 봤을 때 어설프기 그지없는 해머 필름의 공포 영화 한 편을 보면서 더위를 식히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라, 드라큘라 DVD가 어디 처박혀 있더라?"

☞ 본 기사는 딱TV (www.ddaktv.com) 에 8월 19일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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