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자 헤켈이 꽃피운 예술, '아르누보'

테크앤비욘드 편집부 2014.08.02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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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헤켈과 그의 저서'Kunstformen der Natur(자연의 예술형태)'에른스트 헤켈과 그의 저서'Kunstformen der Natur(자연의 예술형태)'


인도양은 거대한 수수께끼다. 말레이항공의 보잉기를 집어삼켰다고 하지만 몇 달째 아무런 흔적도 없다. 막막하고 푸른 그 바다에서 많은 학자가 오래 전부터 심기일전했다. 지난 20세기 초에 그 바다를 직접 찾아간 서양학자들은 동양사상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면 인도양을 알아야 한다고 겸손해 했다. 그들은 그 대양 한쪽 스리랑카 섬의 밀림 한가운데에 인류의 조상이 내려왔다는 아담 봉이 솟아 있다는 것을 알고 경악했다. 훗날 지진해일(쓰나미)로 뒤집히게 되는 바로 그 바다다.

인도 대륙의 신전 건축도, 밀림의 맹수도, 그들과 어울려 태연하게 사는 사람들도 타오르는 태양 아래 끊임없이 태어나고 자라고 죽고 또다시 태어나는 온갖 생물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작렬하는 태양 밑에서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의 사막만 보던 서양학자들은 인도의 뭍과 물에서 풍요롭게만 이어지는 생명의 잔치를 목격했다. 미처 죽음의 슬픔에 잠길 틈도 없이 곧장 다시 살아나는 것들 앞에서 깊이 당혹해 했다.



독일 과학자 에른스트 헤켈도 마찬가지였다. 예나 대학 교수로서 이미 유라시아 대륙과 극지를 돌아다니며 수 천종의 생물을 찾아내고 새로 이름을 붙여주던 그도 인도에 와서 비로소 그때까지 모르던 자연의 경이와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논란이 분분하던 진화론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진화론의 최대 약점은 인간이 원숭이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입증해 줄 ‘연결고리’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유인원과 현생인류 사이에서 오늘날 우리 직계조상의 화석, 즉 유골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때였다. 헤켈은 이 화석 발굴에도 열심이었다. 그래서 학계에서 그는 ‘원숭이 교수’로 통했다. 그는 긴팔원숭이를 비롯해 많은 원숭이를 인류의 먼 친척으로 믿고 집착했다. 물론 어림없는 짐작이었다.

아무튼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해 줄 새로운 증거를 찾아 어디든 달려가던 과학자로서 헤켈은 인도에 와서 그전과 다른 의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인류와 직결된 척추동물과 완전히 다른 동물, 엄청난 이끼와 잡초, 뿌리와 가지를 구별할 수 없이 뒤엉킨 정글을 보면서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 미생물과 갖가지 연체류 등 모든 생물이 하나의 씨에서 태어나 비슷하게 자라나서 살다가 죽는다고 생각했다. ‘만물은 하나의 씨,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추측도 추론도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아예 화가처럼 붓을 들고 자신이 목격한 생물을 그려 나갔다. 허우적대듯 춤추는 해파리와 플랑크톤, 입과 항문이 하나여도 너끈히 살아가는 성게… 그 모든 것을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고 그림으로 그려 낼 의욕으로만 넘쳤다. 문제를 해명하고 싶은 욕심보다 훨씬 더 강렬한 표현욕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선을 긋고 색칠을 하면 할수록 상상도 덩달아 풍부해지는 데에 놀랐다.
그는 수 천점의 그림을 그렸고, 그 가운데 엄선한 100점을 추려 ‘자연의 예술 형태(1904)’라는 단행본을 내놓았다. 이 책은 어떤 생물 삽화가도 그려 내지 못할 참신하고 힘차며 황홀해 보이는 ‘화집’으로 손색이 없었다. 과학책으로만 볼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어릴 때 보던 ‘파브르 곤충기’와 중학교에 올라가 받아든 ‘식물도감’을 능가하는, 아름답고 기이한 ‘생물의 앨범’이었다.
헤켈은 물질계를 신뢰했지만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세포에 새겨진 기억과 크리스털 속에 혼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은 절대자의 뜻과 무관한 순수의 물질세계만은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교 신념과 교리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했다. 자연 환경이 낯선 곳에 가면 우리가 얼마나 세계를 새롭게 볼 수 있는지 헤켈은 멋지게 보여 주었다.

인간은 누구나 진정한 변화를 겪게 되면 수십 년 부리던 고집을 하루아침에 접고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며 시치미를 뚝 떼고 싹 달리지기도 하지 않는가! 훌륭한 반성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배신일까? 엄격한 도제 수업을 받은 예술가일수록 전통에 발목을 잡히기 쉽다. 그들은 전통을 이어 나가고도 있지만 그것을 좀 더 창의력을 발휘해 발전시키는 데 애를 먹는다. 지지부진, 권위와 복고 취향에 얽매여 안절부절못하곤 한다.

'자연의 예술 형태(1904)'의 삽화 Copepod (Copepoda)(왼쪽)과  Anthomedusa'자연의 예술 형태(1904)'의 삽화 Copepod (Copepoda)(왼쪽)과 Anthomedusa

참신한 형태와 세련된 스타일에 목말라하던 지난 세기 초의 건축가, 디자이너들은 알렉상드르 구스타브 에펠이 대담하게 보여 준 것처럼 새로운 금속과 유리 등 건축재를 장식에 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런 차가운 재료를 어떻게 실내장식에 끌어들일까를 고민했다. 쇠시리 장식으로 침대와 의자와 식탁 모서리를 마무리하고, 창틀과 문고리 손잡이에서 램프와 식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상 용구의 내구성 및 미려함을 보충하려 했다. 그럴 때 헤켈의 책이 얼마나 반가운 소식이었을까.

만물이 아무 구애 없이, 원칙과 법칙에 따르지도 않고서 제멋대로 화려하게 모양을 뽐내지 않던가! 기기묘묘한 형태는 황당하지도 않았다. 삶의 신비를 품은 채 그 수수께끼 같은 힘을 불쑥불쑥 토해 내기만 하면 환상 같은 형태가 나타났다. 마치 아름다움과 예술 형태에 애당초 태초부터 정해진 ‘원형’ 같은 것이 있다는 듯 헤켈이 그린 형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자연의 질서를 비웃고 그 질서의 밑바탕에 깔린 형태를 폭로하는 듯했다. 우리가 생물 시간에 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 세포 조직과 미토콘드리아를 그려 볼 때 느끼던 기분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아르누보 영향을 받은 건축물아르누보 영향을 받은 건축물
디자이너들은 헤켈을 ‘현대의 다빈치’라며 추켜세웠다. 그가 생태계를 그림으로 그렸을 때 세상 사람들은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생물종의 발전을 이야기하면서 그 논지를 인간 사회에 응용했을 때 그의 사상은 극히 위험천만했다. 독일 나치는 그의 사상을 ‘더욱 우수하게 발전한 게르만족’이라는 인종 차별의 근거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인종차별 사상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아르누보’ 디자이너들은 대칭과 균형을 중시하는 고전 미학을 포기하고 자유로운 리듬에 따른 헤켈 스타일의 형태를 디자인에 폭넓게 활용했다. 참신한 예술을 추구하던 작가들은 헤켈이 발굴한 생물계의 이미지를 실내장식과 장신구에 응용했다.



그러자 수 천 년 지켜 온 동그란 고리, 한 쌍으로 짝지은 패턴, 같은 요소의 반복, 사실 형태의 재현 같은 상투의 틀을 따르지 않고서도 장신구는 얼마든지 미려해졌다. 놋쇠?주석?금은보석 같은 재료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믿은 미생물, 화초, 수목 등의 느긋하고 활기찬 형태를 빚어내었다. 봉오리에서 활짝 핀 꽃까지, 새싹에서 고목까지, 배아에서 시든 껍질까지… 고대 신화에서 듣던 인간과 동물과 초목이 하나로 뒤얽히고 변신하는 모습을 유연하게 표현했다.
아르누보 패턴아르누보 패턴
이런 혁신은 금세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숟가락 손잡이에 별이 뜨고, 항아리 입술에 이슬 맺힌 꽃다발이 걸렸다. 식탁 모서리를 두꺼비가 지키는가 하면 침대 머리맡에서 원앙이 잠을 자고 연꽃이 만개했다. 앙리 반 데 벨데는 도서관 의자 등받이를 나팔꽃잎처럼 부드럽게 만들었다. 여러 건축가, 조각가들이 헤켈의 형태를 참고했다. 르네 비네(R. Binet)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장의 프랑스관 정문을 올릴 때 헤켈의 데생을 이용했다.
헤켈이 화가로서 재능을 보여 준 것은 자연을 치밀하게 관찰한 덕이다. 아르누보 예술가들은 헤켈의 작품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자기들 나름의 스타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지난 세기 초 유럽에서 아르누보 스타일은 마치 헤켈이 열대 생물을 그 대륙에 이식하기라도 한 것처럼 무섭게 퍼졌다.

아르누보 작가들이 헤켈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활용한 중요한 사례가 있다. 벨기에 시내에 있는 빅토르 호르타의 저택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4층짜리 아파트다. 외관에서 천장과 바닥까지, 가구?식기?장신구까지 모든 것을 치밀하고 일관된 스타일로 꾸몄다. 그 헤켈이 그려낸 아주 작은 생명의 활력을 아파트 구석구석에서 되살아남을 느낄 수 있다.

글= 정진국 사진작가,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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