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중섭 생전의 모습 /사진제공=명동예술극장
이렇듯 그의 예술인생은 짧은 생과 함께 마감하지 않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미술계에 따르면 '2016년 이중섭 탄생 100주기'를 맞아 다양한 기획전과 기념사업 등을 미리부터 준비 중이다. 이미 올 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명화를 만나다-한국 근현대 회화 100선'을 통해 이중섭의 소 그림 3작품이 동시에 걸려 화제를 모았다. 이 전시는 부산시립미술관으로 옮겨져 7월 6일까지 이어진다. 이중 '황소'(1953년경)는 2012년 개관한 서울미술관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가 끝나면 다시 서울미술관 상설전시를 통해 언제든 볼 수 있다.
'길 떠나는 가족'이 그려진 이중섭의 편지. 그는 일본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편지를 쓸 때 그림을 그려 넣곤 했다. (1964년 종이에 연필과 유채 10.5x25.7cm)
그의 편지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표현은 '나의 소중한 남덕 군', '귀여운 남덕 군'과 같은 호칭을 비롯해 '조금도 염려할 것 없소', '안심하시오', '기다려주오' 등이다. 나중에는 '기다려 달라' 대신 '기다려 주겠지요?'라는 더 애틋한 표현으로 바뀌기도 하는데, 이중섭의 여리고 순수한 품성을 잘 드러낸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우리 민족성이 드러난다. 대표작 '소'가 그렇다. 배경과 어우러지는 색감과 구도에서는 서정성이 느껴진다. 빠르고 과감하게 지나갔을 붓질에서 나오는 거친 채색은 어떻게든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의지마저 불끈 느껴진다. 그의 편지 가운데 '들소처럼 억세게 전진'이라는 표현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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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시대와 조국분단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도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오직 그림을 그리고자 했으며, 아내와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했던 '멋진 남자'. 짧은 인생을 살다간 천재화가는 어린아이와 물고기, 게, 꽃, 새 등 아기자기한 소재로 동화 같은 그림을 그리곤 했지만 그 이면에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지 못하는 고뇌와 처절함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 무능함에 대한 자책은 지나친 겸손으로 이어져 자신의 그림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거, 아직 공부가 덜 된 것입니다. 앞으로 진짜 좋은 작품 만들어 선생님이 지금 가지신 것과 꼭 바꿔드리렵니다"라고 약속하곤 했다. 이 특이한 행동은 나중에 식음거부와 가족과의 교신거부로 이어지고, 우울증으로 자살에 이르게 된다.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이경성 미술평론가(1919~2009)는 "중섭의 비극도 결국은 그의 인간성에서 비롯됐다"며 "영악하지 못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고 오직 남을 믿는 마음속에서만 살아온 그의 일생은 손실의 연속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꿈에 살면서 현실을 모르는 그의 성격은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순수하고 순진무구했다는 것이다.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그는 그리고 또 그렸다. 유화 수채화 크로키 데생 등이 약 200점, 은종이에 그린 그림이 약 300점에 이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종이에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다. 이것은 빈곤의 결과이긴 하지만 양담배갑의 은종이에 그린 작품은 '미술 재료의 확장'이라는 평가와 함께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 수장됐다.
이중섭 '황소' 1953, 종이에 유채, 35.5x52cm /사진제공=서울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