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의 기원을 아시나요?…70년전 바로 그 날의 기록

딱TV 김준만 칼럼니스트 2014.06.1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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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TV]쉽고 재미있지만 깊이가 있는…'밀덕' 이야기

편집자주 '밀리터리 덕후' 김준만 - 할리우드 영화와 록 음악에 푹 빠져 사는 ‘피터팬 증후군’ 중증 환자입니다. 밀리터리 관련 글을 인터넷 공간에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것이 樂입니다.

세계가 기억하는 'D-Day'. 그 날로부터 70주년이 됐다. 우리에게는 현충일로 익숙한 6월 6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중요한 군사 작전은 수없이 많았지만, 'D-Day'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딱 그 날 뿐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D-Day'의 기원이 된 그 날, 그 참담했던 현장의 기록을 살펴 본다.

'D-Day'의 기원을 아시나요?…70년전 바로 그 날의 기록


우리에겐 현충일로 기억되는 6월 6일. 단지, '노는 날'로 기억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러나 2014년 6월 6일이 서방 국가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리는 'D-Day 70주년'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1944년 6월 6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패망의 서곡이라 할 수 있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이뤄졌던 날입니다. 아이젠하워 사령관이 이끄는 서방 연합군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이 1941년 6월부터 그때까지 동부 전선에서 나치와의 외로운 전쟁을 해왔습니다.

엄청난 수의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를 감당해야 했던 소련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은 희소식이었습니다. 이 작전의 성공 후 이듬해 히틀러가 베를린 벙커 속에서 자살했고, 나치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 불과 1년이 안 걸렸습니다.



D-Day 70주년을 맞이해 그날의 노르망디 해변으로 잠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D-Day'의 의미

'D-Day'의 기원을 아시나요?…70년전 바로 그 날의 기록

외국에는 'D-Day'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개시일을 일컫는 고유명사로 아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작전을 시작하는 날'의 의미로 쓰여왔던 군사 용어입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날이 바로 노르망디 상륙 작전 개시일이고, 그래서 이날을 마치 작전명처럼 'D-Day'로 지칭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이후 'D-Day'는 일반에서도 널리 쓰이는 용어가 됐습니다.

군사 용어로 'D-Day'와 'H-Hour'는 바로 작전이 개시돼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는 날(日)과 시(時)를 의미합니다. 보통 중요한 작전의 개시일과 시간은 마지막 순간까지 비밀이 되곤 합니다. 그런 탓에 며칠 몇 시라고 얘기할 수 없으니 이런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가령 'H-3'는 언제인지 정확히 모르더라도 작전 개시 시간에서 3시간 전에 해야 할 일들을 얘기할 때 쓰는 표현이 됩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D'라고 했을까요? 바로 'Day of Days' 즉 'Day들' 중에서 무척 중요한 'Day'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다른 알파벳을 사용해서 'D-Day'와 같은 의미로 쓰게 된 예도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태평양 전선에서 맥아더 장군의 필리핀 수복의 시작이 되는 '레이티 섬 상륙작전' 개시일을 'A-Day'라고 부르거나 1945년 4월 1일에 시작된 오키나와 전투의 시작일을 'L-Day'라고 부릅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자칫 혼동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할리우드 영화 사상 최고의 전쟁영화들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할리우드 영화 사상 최고의 전쟁영화들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마하 해변 상륙 장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죠스(1975)', '레이더스(1981)','E.T.(1982)'로 처음 주목받기 시작할 때는 오락영화 감독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아카데미 상의 영예를 안겨준 두 편의 작품 '쉰들러 리스트(1993)'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는 모두 2차 대전 중 유럽을 배경으로 합니다.
특히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오프닝 장면에서 보여주는 D-Day 오마하 해변 상륙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사실적인 전투 장면입니다. 끔찍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 있겠네요.

영화에서 톰 행크스와 그의 부대원들이 상륙하는 해변을 '오마하'라고 부르는데 이는 프랑스 현지 지명이 아닙니다. 연합군은 상륙 예정 해안을 5개로 나눠 각각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스워드'로 불렀습니다.

오마하 해변은 100% 미군 병력이 상륙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날 하루 동안의 전투 결과 다른 4개 지역보다 가장 강력한 독일 방어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무려 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최고의 격전 지역이었습니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5개로 나뉜 상륙 해안 지도↑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5개로 나뉜 상륙 해안 지도
영화를 보면 오마하 해변에서 미군들이 방어하는 독일군의 엄청난 공세에 고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오마하 해변 쪽에 방어를 담당한 독일의 352사단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백전노장들이 다수 포함된 독일 육군의 최정예 부대였습니다. 그런 탓에 그 지역에 상륙한 미 육군은 다른 상륙 해안에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처음에 독일군이 기관총으로 해변에 도착하는 상륙정들을 무차별 사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앞줄의 병사들은 상륙정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벌집이 되어 바닷속으로 처박히는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죠. 과연 진짜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실제 오마하 해변에서 상륙하려던 5만명의 병사 중 3000명이 전사자로 기록됐습니다. 실제로 애초 예정 지점보다 훨씬 동쪽으로 밀려가서 상륙한 상륙정들은 강력한 기관총 초소가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최초에 도착한 상륙정의 장교들과 부사관들, 병사들은 대부분 전멸했습니다.

그나마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모래톱으로 기어 올라온 병사들 역시 제대로 엄폐되지 못한 상황에서 기관총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독일군이 연합군 탱크들의 상륙을 방해하기 위해 세운 장애물들이 아니었으면 연합군 병사들은 엄폐해줄 물건이 하나도 없는 모래사장 위에서 전원 몰살당했을지도 모릅니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수많은 연합군 병사들이 바로 이 독일군 기관총 MG42에 의해 희생됩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수많은 연합군 병사들이 바로 이 독일군 기관총 MG42에 의해 희생됩니다
일명 '오마하의 야수(BEAST OF OMAHA)'라는 별명의 독일군 기관총 사수 하인리히 제페를로(Heinrich Severloh, 1923. 6. 23~2006. 1. 14)의 주장을 들어보면 참담했던 당시를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영화에서 미군 상륙 병력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던 진지와 거의 같은 위치에 전우들과 함께 투입되었습니다. 그는 MG42라는 이름의 기관총과 2정의 소총을 지급 받아서 사격했습니다.

오전부터 시작된 전투는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중지되었는데, 그가 남긴 회고에 따르면 그날 자신이 적을 향해 사격한 기관총탄 양만 무려 1만2000발이었고 그가 혼자서 쓰러뜨린 미군의 숫자만 해도 2000명이 넘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날 하루 동안 '오마하' 해변의 미군 측 전사자 숫자가 3000명으로 기록됐으므로 2000명이라는 그의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아무리 적게 잡아도 그의 기관총에 수백 명은 족히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라는 끔찍한 추측이 가능합니다.

이런 희생을 치른 후에 미군은 함포 지원을 받으면서 뒤이어 상륙한 병력에 의해 1200명의 독일군을 사살하고 기관총 진지들을 파괴합니다. 결국, 상륙에 성공합니다.

'바다의 늑대' U보트…당시 어디에 있었나?

'D-Day'의 기원을 아시나요?…70년전 바로 그 날의 기록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연합군이 상륙하기 전에 독일의 잠수함은 무엇을 했을까요. 도버 해협을 건너오는 연합군 수송선과 군함들을 독일 해군이 자랑하는 '바다의 늑대' U보트들이 미리 발견해 격침했다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초기에 실패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사실 전쟁 초기에 U보트 잠수함 부대가 보여 준 공포의 위협은 당시에 이미 한풀 꺾인 상태였습니다. 연합군 측 해군, 특히 영국 해군은 끊임없이 기술을 개발해 수중의 U보트들을 사전에 발견해낼 수 있었습니다.

일단 위치가 발각된 U보트들은 연합군 군함들의 집요한 기뢰 공격으로 바닷속에서 파괴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 사이에 도버 해협은 대서양과 같은 엄청난 넓이에 바다가 아니라 영국 해군은 U보트를 보다 잘 탐색할 수 있었습니다.

D-Day 전날, 영국 해군은 상륙작전 병력을 수송하는 선단의 경로를 위협할 U보트가 한 척도 없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실제 노르망디 앞바다에 도착할 때까지 U보트의 공격은 없었습니다.

나머지 4개 구역에서 희비가 교차하는 병사들

미군은 오마하와 마찬가지로 유타에서도 애초에 상륙하려던 지점보다 훨씬 동쪽에 상륙했는데, 실수로 상륙했던 곳이 뜻밖에 독일군의 방어가 매우 허술한 지점이었습니다. 덕분에 적은 숫자인 197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수월하게 상륙에 성공하게 됩니다.

게다가 우연이었지만 내륙에 낙하했던 101 공수 사단의 2개 연대와 쉽게 연결되는 행운까지 누리게 됩니다. 101 공수 사단의 본진과 만나게 되면서 쾌속 전진을 하게 된 상륙군은 다른 지역들에 부대들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깊숙이 내륙으로 전진하게 됩니다.

스워드 해안에 상륙한 영국군은 유타와 마찬가지로 독일군으로부터 비교적 약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상륙 첫날 무려 8km 내륙으로 전진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은 전략적 요충지로, 몽고메리 원수가 강력하게 탈환할 것을 명령했던 도시 캉(Caen) 점령에는 실패합니다.

이 지역에서 독일군은 D-Day로부터 무려 한 달 하고도 2주를 넘긴 7월 20일에야 연합군의 공격에 함락됩니다. 특히 이 곳에서의 전투가 언론의 시선을 끈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영국군 상륙 당시 빌 밀린이란 병사가 스코틀랜드 전통 악기인 백 파이프를 연주하면서 상륙을 선도했다는 사실이 보도됐기 때문입니다.

↑ 스워드 해안 상륙 시 영국군 소속 빌 밀린(백 파이프 연주↑ 스워드 해안 상륙 시 영국군 소속 빌 밀린(백 파이프 연주
주노 해안의 상륙을 맡은 캐나다군은 오마하의 미군 다음으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곳에는 2개의 155mm 대포 진지들과 무려 9곳의 75mm 대포 진지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마하 해안보다 두 배나 높은 방벽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상륙 선두 부대들은 50%의 전사자가 발생하며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캐나다군은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독일군 방어 병력에 타격을 주면서 진지들을 하나 둘 씩 점령했습니다. 보병들과 함께 상륙에 성공한 탱크가 이런 성공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애초 중요 목표 중의 하나였던 Douvre 레이더 기지는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로 당일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3일째가 돼서야 영국 코만도 특수부대들이 투입으로 함락하게 됐습니다. D-Day 당일 약 3000명의 캐나다군이 상륙했습니다.

'D-Day'의 기원을 아시나요?…70년전 바로 그 날의 기록
상륙작전 개시 후 약 한 달 반이 지난 7월 24일을 기준으로 연합군 측은 12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독일군 역시 11만명을 웃도는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세계의 역사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치열하고도 참담했던 바로 그 날, 'D-Day'의 기록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현충일, 미국과 유럽 각국에서는 70년 전 조국의 부름을 받고 프랑스의 어느 낯선 해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젊은이를 애도하는 행사가 치러졌습니다.

☞ 본 기사는 딱TV (www.ddaktv.com) 에 6월 11일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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