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와 공급 그리고 길항력

송경모 미라위즈 대표이사 2014.05.29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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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04 대칭과 경제



대칭(symmetry)은 생명체의 기능과 미학의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생명체 대부분은 좌우(bilateral) 또는 방사형(radial)의 대칭 구조를 진화시켜 왔다. 특히 포유류, 조류, 어류 등 고등 생명체는 대부분 좌우 대칭의 체형을 갖추고 있다.

이렇듯 생명체가 좌우 대칭의 몸을 지니게 된 것은 장구한 진화의 역사에서 대칭 체형을 지닌 종들이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대칭 구조가 아닌 체형, 예컨대 외발이나 짝발의 종들이 돌연변이로 등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체형은 생존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도태될 수밖에 없다. 생존의 압력이란 먹이를 얼마나 유효하게 획득하느냐, 자신을 먹으려고 달려드는 포식자에게 먹히지 않느냐의 능력에 달려 있다. 대칭 체형은 바로 이런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먹이를 발견했을 때 먹이를 향해 신속하게 달리기 위해서는 외발이나 짝발, 한 날개 내지 짝 날개로는 도저히 곤란하다. 양 팔 또는 양 날개와 양 다리가 번갈아 가며 균등한 이동을 뒷받침해 주어야만 그것이 가능하다.



대칭 속에 자리잡은 비대칭
그러나 생명체의 구조가 속속들이 대칭인 것은 아니다. 이런 대칭의 체형 안에 비대칭이 또한 자리를 잡고 있다. 예를 들어 먹이를 탐지하고 위험을 인지하기 위해 눈, 귀, 코 같은 감각기관이 한쪽에 집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감각기관을 통제하는 중앙처리장치인 뇌 역시 그들 감각기관에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

이렇게 감각기관과 뇌가 몰려서 한쪽에 위치한 신체 부위를 우리는 머리라고 부른다. 만일 머리에 위치한 감각기관으로 먹이를 발견했다고 하자. 다음 순서는 머리 부분을 앞세운 채 네 다리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먹이에 접근하는 일이다. 이때 그 먹이를 섭취하기 위한 장치가 머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면 한없이 불편할 것이다. 애써 발견한 먹이에 입을 갖다 대기도 전에 그 먹이가 도망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먹이에 도달하는 즉시 신속한 섭취를 위해 입이 감각기관과 함께 머리에 붙어 있는 종들이 더욱 잘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먹이를 섭취한 뒤 그로부터 칼로리와 영양분을 분리해서 몸의 구석구석에 공급하는 여러 장기도 대칭과 비대칭의 구조를 적절히 갖추게 되었다. 이렇듯 모든 생명체는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대칭과 비대칭의 기관들을 진화시켜 왔다.

쌍(pair)이 아니면 경제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대칭의 원리는 경제 부문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모든 동물이 한 발로 생존하기 어렵듯 모든 경제 활동 역시 홀로 서기만으로는 그 기능을 절대로 발휘할 수 없다. 어떤 한 경제 체제의 의사결정은 반대쪽에서 이루어지는 또 다른 의사결정과 짝을 이루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경제는 지속이 가능하다. 지속 가능하다는 것은 도태의 압력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대로 된 쌍을 갖추지 못한 모든 경제 체제의 의사결정 또는 그 의사결정의 구현체로서의 제도와 기구는 결코 지속이 가능하지 않다.

이 원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수많은 경제 현상 곳곳에 숨어 있다. 여기에서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 길항력의 등장, 관행의 형성이라는 세 가지 현상에서 어떻게 대칭의 원리가 작용하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대칭1- 수요와 공급의 원리
근대경제학의 태두인 앨프리드 마셜(A. Marshall)은 수요와 공급을 가위의 양날에 비유했다. 한쪽 날만으로는 가위가 가위로서 제 기능을 작동할 수 없다. 수요는 시장에 등장한 상품에 대한 최대한의 지불의사(maximum willingness to pay)를 의미하고 공급은 최소한의 수취 요구(minimum requirement to be paid)에 대한 의사를 의미한다.
시장에 등장한 상품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수준이 짝을 맞추지 못하면 어떤 상품이든지 시장에서 이내 도태된다. 짝을 맞춘다는 것은 가격에 대한 최소한의 수취요구 의사가 있는 공급자가 그 이상 최대한의 지불 의사가 있는 수요자와 만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상품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 그동안 투입한 비용을 감안할 때 개당 최소한 1만원의 가격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급자가 그 상품에 대하여 예컨대 최대한 1만 5000원까지 지불할 의사가 있는 수요자를 만나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단 이런 만남이 이루어져야만 협상, 가격 결정, 거래 성사가 이루어질 것이다.이런 생각을 하는 양측이 서로 멀고먼 곳에 숨어 있어서 만나지 못하거나, 설령 만났다 하더라도 양측이 생각하는 가격 수준이 터무니없이 어긋나 있다면 거래 성사는 꿈도 꿀 수 없을 것이다. 거래가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은 기업이 먹이를 섭취할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자(고객)와의 만남을 통해 먹이를 섭취하지 못하는 공급자(기업)는 도태되기 쉽다. 먹이를 찾기 위한 빈번한 탐색과 유인 과정에서 먹이를 포식하게 되는 빈도가 임계치를 넘지 못하면 해당 상품, 더 나아가 그 상품을 등장시킨 기업은 자신의 신체와도 같은 자본을 갉아먹다가 결국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는 마치 생명체가 장기간에 걸쳐 외부에서 먹이를 섭취하지 못하면 체내에 축적된 열량과 영양분을 소모하다가 사망에 이르는 것과 같다.

피터 드러커(P. F. Drucker)가 기업의 존재 이유를 기업 자체에서 찾지 않고 외부에 존재하는 고객에서 찾은 것도 대칭의 맥락 속에 있다. 헤겔 식 용어를 빌리면 기업은 즉자(Ansich)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대자(Fuersich)다. 어떤 한쪽이 사라지면 반대편에서 대칭의 한쪽으로서만 존재하는 주체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기업가가 상품을 내놓지 않으면 그걸 찾는 고객 역시 없을 것이며, 고객이 그것을 찾지 않으면 기업가 역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내가 사라지면 거울에 비친 대칭의 나도 사라지는 것처럼 수요와 공급, 기업과 고객은 영원한 대칭 구조 속에서 서로의 생존을 구속한다. 대칭의 아름다움은 바로 균형 또는 평형(equilibrium)의 아름다움이다. 홀로는 절대로 설 수 없는 상태에서 양자가 서로 마주 볼 때의 아름다움이다.

소비와 공급 그리고 길항력


대칭2- 길항력
원래 길항력(countervailing power)이란 정치학에서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지 않도록 상호 견제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제도경제학자인 존 갤브레이스(J. K. Galbraith)는 이 길항력의 개념을 산업 사회에 적용했다. 그는 거대 기업의 막강한 권력과 그에 따른 가격 횡포는 역시 그 반대편에 있는 거대한 구매자의 힘으로 견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규모 구매자뿐만 아니라 시민 단체, 소비자 단체 역시 이런 길항력을 행사하는 역할을 한다.
길항력은 경제의 진화 과정에서 힘이 어느 한 곳으로 과도하게 집중하는 순간에 등장한다. 경제력이 한 곳으로 지나치게 집중할 때 반드시 그를 견제하는 또 다른 힘이 태동한다. 이런 현상은 종종 그럴 듯한 윤리 명분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 본질은 생존을 위협받는 주체가 자신의 자연선택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발휘하는 자연스러운 메커니즘, 즉 먹이의 확보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진전된 전략에 불과하다. 경제 자원이 한 곳으로 집중되다 보면 거기에서 배제당한 대다수의 자원들은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막대한 규모로 성장한 대기업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시장을 독점하려고 시도하거나 복잡다단한 기업집단을 구성한 뒤 수많은 계열사를 통해 공정한 외부 기업의 경쟁 참여를 배제하면서 이익을 수취해 나간다면 반드시 반독점 논의와 기업집단 해체라는 사회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 길항력에 대하여 선과 악의 기준 또는 도덕성 가치관에 의거하여 판단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그것은 진화의 한 전략으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현상일 뿐이다. 길항력이 어떤 형태로 등장하든지 생존에 적합하지 않는 전략은 점점 그 힘을 잃고 도태될 것이다. 그 어떤 도덕성 명분도 자연선택의 위력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노동조합은 산업사회 초창기에 자본가의 횡포에 대응하여 태동한 뒤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길항력의 한 형태다. 미래에 살아남느냐와 아니냐는 결국 어떤 전략을 택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드러커가 일찍이 지적한 대로 교육 수준의 향상과 노동자 이동성의 증가, 지식노동자의 비중 증대라는 20세기 이후의 현실에 노동조합은 아직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흔히 접하는 귀족 노조 또는 파행과 이기심 강한 노조의 행태는 그것이 단지 비도덕하게 비춰져서가 아니라 스스로 대칭의 원리를 파괴함으로써 점점 소멸될 것이다. 우리는 대칭의 역할을 포기한 채 비대해진 노조를 둔 GM과 포드가 몰락하는 장면을 이미 생생하게 경험했다. 노조 역시 홀로는 존재할 수 없는, 적절한 쌍(pair)을 곁에 두고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기구라는 사실을 스스로 망각하기 쉽다. 이 망각은 결국 자멸에 이르는 가장 손쉬운 길이다.

영원한 독점은 그 어디에서도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단순히 정치 형태로 등장하는 길항력 때문만은 아니다. 대칭을 추구하면서 진화하는 시장은 항상 독점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모든 고객은 욕구를 진화시키면서 항상 새로움을 찾는다. 어떤 독점이든 처음에 등장할 때는 고객에게 어느 정도의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고객은 수요자로서, 즉 그 기업의 대칭되는 존재로서 기업의 새로움을 받아들이고 구매에 참여한다. 비로소 한 쌍의 대칭이 처음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한때 고객에게 신선하던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익숙함과 낡음이 된다. 태블릿 컴퓨터가 처음 등장할 때는 새로움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일상용품이 된다. 처음 들어 있던 기능에 고객 대부분이 환호했지만 어느 날부터는 이게 부족하고 저게 안 되고 이것도 되면 좋겠다는 등 새로운 욕구들이 수많은 사용자들 사이에 등장한다.

이렇듯 고객은 어느 순간 낡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새로움을 찾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점 기업은 이 새로움의 욕구에 잘 부응하지 못한다. 고객 입장에서는 그 상품이 이미 낡음이 되었음에도 고객은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는 가격을 지속해서 지불하고 그 낡은 상품을 구매해 소비한다. 이런 상황이 어느 정도 지속되면 그 독점기업은 스스로 생존에 문제가 전혀 없다고 착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고객은 누군가 자신의 진화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새로운 대안이 등장하기를 기대하는 상태가 되어 있다. 바로 애초의 대칭이 깨진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독점기업과 고객 간 대칭 상태가 내부로 무너져 있을 때 항상 새로운 혁신 기업이 등장한다. 파괴된 대칭의 불편함 속에서 새로운 욕구의 해결 처를 찾던 고객은 이내 하나둘 그 혁신 기업을 선택하게 된다. 파괴된 대칭은 항상 자기를 복원하려고 한다. 역사 속으로 수많은 독점 대기업이 이렇게 사라졌다. 이렇게 등장한 혁신 기업은 다시 새로운 지배 기업이 된다. 새롭게 등장한 대칭은 어느 날 다시 파괴되고 또 다른 혁신 기업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대칭의 질서를 몰고 온다. 이렇듯 대칭을 회복함으로써 생존의 기회를 극대화하려는 무한한 진화의 반복이 경제 발전의 핵심 동력이다.

물론 산업 사회에서 오직 대칭의 역학만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 비대칭의 역학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다. 마치 팔다리는 대칭이지만 머리, 몸통, 다리의 순서가 비대칭인 것처럼 산업 구조에도 역시 가치사슬(value chain)이라는 비대칭의 구조가 있다. 앞의 머리로부터 뒤의 꼬리에 이르기까지의 비대칭은 전방의 고객으로부터 후방의 연속되는 공급자들로 이어진 가치사슬(value chain)의 비대칭과 같다. 비대칭 원리의 가치사슬은 항상 대칭 원리의 기업-고객, 사용자-노동자의 관계 속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소비와 공급 그리고 길항력
대칭3- 관행의 형성
관행 경제학(economics of convention)을 이야기한 경제학자 가운데 페이턴 영(H. Peyton Young)이 있다. 관행이란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 양식을 의미한다. 그 어떤 논리의 근거가 있어서라기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행동 양식을 따르는 것이 서로에게 편하기 때문에 관행이 작동한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남들 역시 그 행동 양식을 따를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에 나 역시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예를 들어 좌측통행이나 우측통행의 관행을 들 수 있다. 어느 나라에서는 좌측통행, 어느 나라에서는 우측통행이 관행이다. 이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이웃들의 행동 양식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자신의 행동 양식을 형성시킨 결과다. 우측통행을 하는 마차를 보면 우측통행을 하는 것이 자기 안전을 유지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이런 기대는 과거에 마주 달리다가 사고가 난 기억 또는 잘 피해 가서 사고가 나지 않은 기억에 의거하여 형성된다. 어떤 사회에 속한 수많은 사람이 각자 자신이 보유한 이런 기억들과 그 기억에 의거한 기대 속에서 행동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느 한 방향으로 관행이 형성된다. 그것이 어느 사회에서는 좌측통행, 어느 사회에서는 우측통행으로 각각 귀결된 것이다.

이렇게 관행이 한 번 형성되면 그 관행을 어기는 사람이 이따금씩 등장해도 그런 어기는 전략은 생존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 번 굳어진 관행은 좀처럼 바뀌기 어렵다. 더욱이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관행이 어느 날 법제화되고 나면 더욱 그렇다.

기존의 관행과 다른 행동이 전체 인구 가운데 극소수의 비율로 발생할 때에는 기존의 관행이 바뀌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이것을 영은 ‘확률상 안정된 균형’이라고 지칭했다) 하지만 거대한 세력의 형태로 관행이 일시에 바뀌는 경우도 종종 존재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모든 마차는 우측통행을 하는 것으로 일시에 바뀌었다. 과거에 좌측으로 다니는 것이 관행이던 마차는 귀족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마차도 평민이 다니던 우측으로 똑같이 다니라는 것이었다.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의 길항력이었다. 길항력의 등장은 기존의 관행을 바꾸고 새로운 하나의 단속된 균형(punctuated equilibrium) 상태로 새로운 관행을 정착시키는 출발점이 된다. 길항력은 기존의 관행에서 안정된 대칭 관계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을 즈음 그 대칭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힘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하나의 관행이 새로운 균형으로서 등장하는 동태 과정에서도 이처럼 대칭의 원리가 작용하지만 이미 형성된 관행을 정태 상으로 관찰해 보아도 그 안에는 대칭의 원리가 숨어 있다. 좌측통행이나 우측통행처럼 항상 마주 보는 주체들 사이의 관계에는 분명히 대칭 현상이 있다. 이 밖에 사회적 관행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분배(sharing)에서도 역시 대칭의 원리가 작용한다.

사냥에 성공한 먹이는 어떻게 나눌 것인가? 먹이란 바로 경제 주체의 수익(revenue)를 의미한다. 나눔의 문제는 개인이나 기업을 막론하고 진화의 주체가 불가피하게 직면하게 되는 숙명이다. 왜냐하면 개체의 생존을 유지할 먹이의 크기라는 문제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이 문제를 공정한 분배(fair distribution) 관점에서 연구해 왔다. 특히 완벽한 계산 능력과 지식이 있는 개인을 전제하고 그의 균형 배분 전략을 찾는 문제에 집중해 왔다. 예컨대 협상 게임(bargaining game)의 합리에 들어맞는 해로 내시 균형(Nash equilibrium)을 찾는 시도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현실의 경제인들이 실제로 내시 균형을 직접 계산하면서 행동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사람들은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 아래에서 일단 되는 대로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그것이 통하면 다음에도 계속 요구하고, 통하지 않으면 전략을 바꾸는 식의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의 행동 양식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학자 영은 인도의 수많은 마을이 소작농과 지주가 곡물 수확을 배분하는 비율을 관찰한 결과 일부 마을에서 지주 또는 소작농의 어느 한 쪽이 곡물의 4분의 1을 나누어 가질 뿐 대다수의 마을에서 절반씩 나누어 갖는 관행이 형성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왜 하필 50대50이 가장 우월한 관행이 되어 있는가? 이는 여러 가지 배분 몫을 요구하는 시도를 반복해 본 결과 지주와 소작농 모두의 생존 가능성이 최상이 되는 전략으로 50대50이 가장 빈번하게 채택될 수밖에 없다는 진화의 한 결과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전지전능한 지식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과거에 한 경험, 남들이 한 행동에 대한 기억 중 몇 가지에 바탕을 두고 의사결정을 한다. 과거에 내가 몫을 요구하거나 받은 경험, 이웃 사람들이 몫을 요구하고 받아간 기억들을 수시로 떠올리면서 오늘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 결과가 50대50, 즉 양측의 대칭되는 배분으로 귀결된 것이다. 물론 현실의 수많은 배분은 50대50이 아니라 먹이 획득에 자신의 기여분만큼, 즉 한계생산성만큼을 반영하여 그 절대치의 배분율이 정해질 것이다. 예컨대 10대1, 8대2, 7대3 같은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먹이의 절대량이 아니라 한계생산성으로 조정된 먹이의 크기로 환산해 보면 모든 배분은 양측에 50대50으로 수렴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대 기업에서 임원, 직원, 투자자 등 모든 참여자의 정확한 성과기여도를 미리 정확한 양(quantity)으로 측정하는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진화의 원리가 철저하게 작용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는 많은 사람이 관행으로 따르는 분배율에 이미 그 기여도가 간접으로 충분히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배분의 바로미터, 즉 임금·가격· 이자율·수익률 등 이 모든 숫자는 겉으로 볼 때 무질서하게 나열된 천차만별의 숫자들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사실은 모든 참여자 사이에 대칭 역학이 충실히 작용된 결과로 발현된 숫자들임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물론 참여자들 사이에서 교섭력의 편차는 시시각각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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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주신 분김봉주 국회 입법조사처 산업자원팀장(경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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