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회사는 35개나 난립… 생존 위해 책동전도 불사
1960년대 증권회사 객장에서는 증권회사 직원이 증권업협회의 시황 방송을 들으며 칠판의 증권시세표에 주가와 채권가격을 일일이 적었다.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7월의 어느 날이었다. 한창 해동화재주 매수에 열을 올리는 김동만 당시 태양증권 사장을 만나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느냐고 물어봤다. 김동만씨는 원래 '공매도의 귀재'로 불릴 정도로 매도를 잘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갑자기 매수 쪽으로 돌변한 게 의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 역시 의외였다.
김동만씨가 여기서 말한 저쪽이란 다름아닌 '증권가의 풍운아' 윤응상씨를 말하는 것이었다. 5월 증권 파동의 주역인 윤씨는 군사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 재기를 모색하다 1964년 3월 자기 계열 증권회사인 남양증권과 삼신증권을 동원해 증금주 주가를 끌어올리는 책동전을 개시했는데, 이로 인해 증금주는 3일 동안 매일 20%씩 폭등하며 상한가로 치솟았다. 그러나 공매도의 명수인 김동만 사장이 이를 가만히 지켜볼 리 없었다. 김 사장의 태양증권이 공매도에 나서면서 치열한 매매 공방전이 벌어졌고, 윤씨 계열의 남양증권과 삼신증권 사이에 알력이 생기면서 증금주는 급락하고 말았다.
증금주 책동전은 이렇게 해서 자금 부족에 직면한 매수 측의 후퇴로 끝나게 됐는데, 윤씨 계열에서는 부족한 결제자금 대신 보유하고 있던 해동화재 주식 92만5000주를 김 사장에게 넘겨주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공매도의 고수였던 김동만씨가 하루아침에 매수 세력으로 돌아선 것이었으니, 해동화재주 책동전의 씨앗도 실은 윤응상씨가 제공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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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화재 주식은 원래 식산은행청산위원회에서 소유하고 있었는데, 1962년 5월 증권파동으로 휴장했던 증권시장이 그해 7월13일 거래를 재개하면서 대한중석, 서울은행 주식과 함께 증권거래소에 새로 상장된 것이었다. 지금은 상장에 앞서 기업공개를 하지만 당시는 공매 입찰로 민간에 주식을 매각했다. 그때 윤응상씨 계열 증권회사인 통일증권과 일흥증권에서 각각 20만주, 19만9000주를 낙찰받았다. 공매입찰 주식이 모두 40만주였으니 사실상 전부를 윤응상씨 계열에서 가져간 것이었다.
당시 해동화재의 자본금은 400만원이었는데, 계약고가 140억원에 달할 정도로 재무구조가 매우 우수한 편이었고, 1961년의 자기자본이익률도 13.8%에 달해 비교적 건실한 편이었다. 해동화재의 기업내용이 이처럼 좋다 보니 공매 입찰을 앞두고 산정한 사정가(査定價)가 주당 2000환이었지만 최종 낙찰가는 최고 3200환에서 최저 2100환에 달했다.
1961년에 실시된 한전주 입찰 장면. 지금은 상장에 앞서 기업공개를 하지만 당시는 공매 입찰로 민간에 매각했다. /사진=금융투자협회
아무튼 7월 중순 무렵 김동만씨가 집중 매수하면서 해동화재 주가는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7월 하순에는 김씨의 매수 소문이 시장에 퍼진 데다 삼락증권의 김윤도 사장이 매수에 가세하면서 해동화재 주가는 폭등세를 보였다. 당시 해동화재주 책동전에 나선 매수와 매도 양측 진영의 면면은 그야말로 쟁쟁했다. 매수 측에는 김동만씨와 김윤도씨, 매도 측에는 권철현 연합철강 사장이 설립한 진화증권과 막강한 재력의 한양증권, 대림산업 계열의 서울증권 등이 버티고 있었으니 어느 쪽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청산거래로 매일 차금 정산, 주가변동에 회사운명 달려
가격제한폭 축소 등 규제도 과열된 시장에선 무용지물
거래 양상은 갈수록 뜨거워졌다. 당시 청산거래에서는 주가가 오르내릴 때마다 매일같이 전날 가격을 기준으로 차금을 정산해 매매 쌍방이 주고 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가가 오르면 매도 측에서 차금을 내놓아야 했고, 주가가 내리면 매수 측에서 차금을 내놓아야 했다. 하루하루 주가 변동이 양측의 자금사정은 물론 승패와도 직결되는 셈이었다.
이같은 책동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매수 세력은 무조건 사자 주문을 내서 주가를 끌어올려야 했고, 매도 세력은 무조건 팔자 주문을 내서 주가를 끌어내려야 했다. 그러니 책동전이 끝날 때까지 양측은 사생결단 식으로 치열한 공방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동화재 책동전은 기본적으로 매수 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싸움이었다. 김동만씨 쪽에서 이미 발행주식의 95%를 확보해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매도 측이 아무리 공격해와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8월 들어 해동화재 주가가 계속 치솟자 증권거래소에서는 매도 측의 결제 불이행 사태를 우려해 매수 측에게 반대매매를 권유하기도 하고, 가격제한 폭을 10%로 낮추는 등 잇단 시장규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한번 붙은 불길을 쉽사리 잡을 수는 없었다.
급기야 9월7일 해동화재 주가는 액면가(10원)의 10배인 100원을 돌파했고, 9월 하순으로 접어들자 매도 측에서는 증거금을 납부하지 못하는 사태에 이르게 됐다. 결국 정부가 중재에 나서 책동전을 마무리하도록 했다. 김동만씨 측은 1억원짜리 해동화재를 1억8000만원에 인수하게 됐고, 매도 공세를 폈던 진화증권, 한양증권, 서울증권은 당시로서는 거액인 1억8000만원을 날린 것으로 알려졌다.
해동화재 액면가 10배 돌파… 매도측 증거금 미달사태로
김동만씨 완승 경영권 장악… 우리나라 첫 기업 인수사례
1964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해동화재주 책동전은 이렇게 끝났다. 시장 주변에서 우려한 또 한 차례의 파동은 다행히 모면했고 결과적으로 김동만씨가 해동화재 발행주식을 매집해 경영권을 장악하게 됐다. 우리나라 주식시장에서 처음으로 이뤄진 테이크 오버 비드(Take Over Bid, 기업인수) 사례였다.
책동전이란 일본의 사수전(仕手戰)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명 '사수'라고 불리는 매수 혹은 매도 세력이 일시적으로 증권시세를 조작해 큰 이익을 취하려는 작전이었다. 따지고 보면 1958년의 1·16 국채 파동이나 1962년의 5월 증권 파동도 이런 책동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책동전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청산거래 때문이기도 하지만 증권시장이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여정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증권거래소에서 입회를 하는 광경. 위쪽에서 손질을 하고 있는 사람이 시장대리인이고 아래쪽은 참관인들이다. /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주식시장이 그 나라 경제의 바로미터라고들 하지만 그건 경제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의 일이다. 그 시절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도 채 안 됐다. 1960년의 1인당 국민소득이 79달러에 불과했고, 1965년에야 비로소 105달러를 기록했을 정도니 증권시장이 제대로 돌아가기에는 기본 동력이 부족했다.
영세한 시장환경 아래서 증권회사 숫자는 많고 어떻게든 수입은 있어야 하니 몇 종목 안 되는 상장주식을 놓고 책동전을 벌이곤 했던 것이다. 지금은 제도적으로 이런 작전 자체가 아예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해놓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사실 어느 나라 증권시장이든 다 이런 과정을 거쳐 조금씩 제자리를 잡아갔다. 미국도 그랬고 일본도 그랬다. 우리나라 증권시장도 그렇게 성장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10회는 대한통운주 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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