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변기 높이 '37㎝'의 비밀

머니투데이 신아름 기자 2014.02.1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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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름의 시시콜콜]

대학시절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런던 인(in), 파리 아웃(out)'이라는 배낭여행족의 전형적인 루트에 따라 처음 발을 내딛은 곳은 영국 런던 알게이트 이스트 역 바로 앞에 위치한 어느 여행자용 호텔. 일단 짐을 풀고 화장실에 갔을 때 낯선 경험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양변기 높이가 국내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한참 높게 느껴졌던 것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 양변기에 앉았을 때 발바닥이 화장실 바닥에 간신히 닿았을 정도였다. 순간 발 밑에 받침대라도 깔아야하나 고민했지만, 대한민국 여성 평균 보다 10㎝나 더 큰 키에 대한 자존심(?)이 상해 오기로 꿋꿋이 용변을 봤던 기억이 난다.



런던에서 겪었던 충격은 서양 국가들과 국내의 양변기 표준이 다른 데서 기인한다. 유럽 등 서양국가에서는 양변기 높이(변좌에서부터 화장실 바닥까지의 길이)가 약 41~42㎝다. 하지만 국내 양변기의 경우 높이가 37~38㎝다. 최대 5㎝ 차이가 발생한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체형 특성을 각각 반영한 결과다. 서양인은 동양인에 비해 평균키가 크고, 다리길이도 길기 때문에 양변기 높이도 그만큼 높아져야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양변기 도입 초기에는 서양식 양변기를 그대로 갖다 쓰는 바람에 양변기 높이가 굉장히 높았다. 그러다 한국 사람들의 다리길이에 맞는 '현실적인' 양변기 개발의 필요성이 커졌고, 양변기 제조업체들은 디자인 연구를 거듭한 끝에 한국인의 다리길이에 최적화된 높이를 찾아냈다. 현재 국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양변기 높이 37㎝가 탄생한 배경이다. 이는 '유저 익스피리언스'(UX) 디자인(제품 사용자의 관점에서 그동안의 경험을 접목시킨 디자인)의 개념이 적용된 사례로도 주목받고 있다.



양변기 제조업계에서 UX디자인이 적용된 사례는 또 있다. 장애인 등 신체에 제약을 받는 특정 계층을 위한 양변기가 대표적이다. 아이에스동서 (26,700원 ▼50 -0.19%)가 국내 업체들 중 최초로 내놓은 '장애인용 후레시 밸브 양변기'의 높이는 휠체어 높이와 같은 42㎝다. 장애인을 직접 면담하는 등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사전에 철저히 조사하고 연구한 끝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화장실 사용에 있어 큰 어려움이 없으려면 양변기 높이가 휠체어 높이와 일치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고 제품에 반영한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서양에서도 요즘 양변기 높이가 점점 낮아지는 추세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업계 한 관계자는 "식습관, 스트레스 등의 영향으로 만성 변비 증세를 달고 사고 현대인들이 용변을 잘 보기 위해서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 바닥과 가까이에 있는 것이 유리하다"며 "때문에 서양 국가들에서도 예전처럼 높은 양변기를 찾아보기 힘들어지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아무리 다리가 길어도 중력의 법칙은 피해갈 수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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