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기업도 피해자다"

머니투데이 박종면 더벨대표 2014.02.10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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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수산부 장관이 여수 기름유출 사고와 관련해 “1차 피해자는 GS칼텍스고, 2차 피해자는 어민들”이라고 말했다가 해임되고 말았지만 GS칼텍스가 어민들과 함께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번 일은 도선사가 안전 속도를 무시하고 과속해서 GS칼텍스의 송유관을 들이받아 생긴 사고다. 그럼에도 환경정책기본법에 따라 환경오염물질을 저장하고 있던 GS칼텍스는 잘못이 없어도 책임을 져야한다. 이미 GS칼텍스는 방제과정에서의 비용뿐 아니라 어민 피해에 대해서도 우선 보상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일단 천문학적 부담을 떠안게 됐다.



GS칼텍스는 국내외 경기악화와 공급 과잉에 따른 사업 부진에다 정부의 강압적인 기름 값 인하 요구, 공정위의 담합 과징금 부과 등으로 어려움이 많은 상황에서 이번에 기름 유출사고 까지 당해 심각한 경영 위기를 맞고 있다. GS칼텍스는 여수 어민들 못지않은 피해자인데도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되고 있다.

신용카드사 개인정보 유출 사고에 대한 국회 정무위 국정조사 현장검사 과정에서 NH농협카드 사장이 “저희들이 피해자”라고 발언 했다가 여야 의원들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았다.



그의 발언이 국정조사 현장에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정보유출 사건의 최대 피해자가 KB국민카드 NH농협카드 롯데카드라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다. 1억건이 넘는 정보가 유출되긴 했지만 이로 인한 고객들의 2차 피해가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3개 카드사들은 전화영업이 중단됐고, 3개월 영업정지라는 역대 최고의 제재를 받았다. 여기에다 수백만 건의 카드 재발급 비용과 앞으로 있을 손해배상 비용까지 감안하면 3개 카드사는 올해 1000억~2000억원의 연간 순익을 모두 까먹을 것으로 보인다. 무형의 브랜드가치 하락이나 고객이탈에 따른 피해를 빼고도 말이다. 3개 카드사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고, 카드산업 전체의 위기로 확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카드사도 피해자’라는 말은 금기어가 되고 말았다.

‘피해자’는 GS칼텍스나 카드사들만이 아니다. LIG그룹의 구자원 회장과 그의 장남 구본상 부회장은 계열사인 LIG건설의 사기성 CP발행에 연루돼 1심에서 징역 3년과 8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구회장 부자는 사재를 다 털고 친인척들에까지 돈을 빌려 CP투자자들의 피해액 2100억원을 모두 갚았다. 하지만 지금 이들 부자에게 남은 것은 혹독한 징역살이와 43년을 키운 주력사 LIG손보의 매각이다. 피해를 다 보상해 주고도 회사 잃고 징역살고, 이런 횡액이 또 있을까.


SK 최태원 회장은 계열사 자금 450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항소심에서 4년형을 선고받고 대기업 총수로서는 최장인 1년 이상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법적 논란을 떠나 그로 인해 다른 어떤 개인도, SK 계열사 어디도 피해를 본 게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피해자는 역설적으로 최태원 회장 본인이다.

라틴어 문구에 '에트 인 아르카디아 에고(et in arcadia ego)'라는 말이 있다. ‘나 죽음은 여기, 삶의 한 가운데에 있노라’는 뜻이다. 개인의 삶도, 기업경영도 특별하지 않으며 근심과 노고, 절체절명의 위기는 늘 우리와 동행한다. 그래도 무덤의 묘비명으로 적합할 이 말을 우리 기업이나 기업총수들이 자꾸 되뇌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건 비극이다.

어디 이들 뿐인가. 한화 김승연 회장, CJ 이재현 회장, 효성 조석래 회장, 태광 이호진 회장 등 병들고 지친 몸으로 때로는 생사의 기로에 서서 병원과 법정을 오가는 기업가들이 한둘이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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