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물이 분류되는 모습 /사진제공=한진
박씨는 "도로명주소는 아예 안쓴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배송에 나서며 그가 손에 쥔 100여장의 송장 중 도로명주소로 표기된 것은 단 5장. 그것도 이미 지번주소를 검색해 적어뒀다. 택배 배송현장, 그곳에 도로명 주소는 없었다.
이미 택배업체나 유통업체는 1~2년 전부터 도로명 주소체계를 대비해 병행표기시스템을 준비했다. 물량의 80~90%가 유통업체 등에서 오는 기업물량임을 감안하면 대부분이 지번주소와 도로명주소를 병행표기한 것이다.
배송을 하기 전 운행동선을 짜고 있는 배송직원의 모습 /사진=김남이 기자
배송직원들은 '동'(洞)별로 구역을 나누기 때문에 택배물은 반드시 동을 알아야 한다. 이에 동이름이 없는 도로명주소만 적힌 물량은 지번으로 바꿔 다시 분류하는 작업이 추가된다. 개당 30초씩만 해도 하루 120개면 1시간. 식사시간도 없이 배송하는 직원들에겐 아까운 시간이다.
동별 분류작업을 마친 배송직원들은 운송장을 갖고 사무실로 와서 그날의 운행동선을 짜기 시작했다. 그들이 펼쳐놓은 것은 지번주소 지도. 이 과정에서 도로명주소만 적힌 송장은 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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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송을 하고 있는 박남규씨 /사진=이동우 기자
배송 초보자인 취재팀에게 지번 주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배송을 간 후암동은 언덕길이 많았는데 배송지를 찾기 위해 연신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했다. 예컨대 4번지에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5, 6번지가 보이는 언덕을 오르면 4번지는 전혀 딴 곳에 있었다.
특히 실향민들이 움막을 짓고 살면서 형성된 해방촌 일대는 번지수가 매우 불규칙했다. 배달해야 할 지번주소가 지도에 없는 곳도 있었고, 어떤 곳은 18번지 옆이 1590번지인 경우도 있었다.
반면 규칙적으로 주소가 배열된 도로명 주소는 더 편했다. 두텁바위로39 옆은 여지없이 두텁바위로41이 있었다. 박씨도 "후암동은 익숙한 동네라 지번이 편하지만 만약 다른 곳으로 옮긴다면 도로명 주소가 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택배업계에서 도로명 주소를 쉽게 쓸 수 없는 이유는 수십년간 이어온 배송 시스템 때문이다. 동별로 구역을 나누고 배송을 하는 현재 시스템에 도로명 주소는 맞지 않다. 박씨의 배송구역에 있는 '소월로'만해도 후암동, 용산동, 이태원동, 한남동, 회현동 등 5개의 동이 연결돼 있다.
박씨는 “지금은 도로명주소가 큰 의미가 없다"며 "길을 따라 움직이는 식의 배송 시스템이 정착돼야 도로명주소가 요긴하게 쓰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택배업계 관계자는 “도로명 주소와 지번주소를 병행 표기하는 것은 직원들이 더 쉽게 도로명 주소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하는 목적도 갖고 있다”며 “도로명 주소만 쓰는 것도 고민하고 있지만 당장 쓰기에는 사실상 무리”라고 말했다.
이희정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기존의 지역성이 살아있는 동 체계를 대신해 생소한 '길'이라는 것으로 대체하 것은 문제"라며 "새롭게 주소를 정비하더라도 기존의 지번체계의 장점을 살리는 방법을 고려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