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산물 없는 강진에서 특산물 만드는 '해들녘애'

머니투데이 민노 슬로우뉴스 편집장 2014.01.25 07:11
글자크기

[머니투데이가 함께하는 사회적기업]

편집자주 가치있는 물건을 팔아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기업들이 있습니다. 머니투데이와 이로운넷은 가치를 파는, 영혼이 있는 기업을 찾아 소개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지구, 더 진화된 인류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한걸음씩 나아가는 사회적 기업들을 만나봤습니다.

"나더러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가진 것들 얘기부터 할 수밖에 없다."(파블로 네루다, 망각은 없다)

호박 고구마 말랭이와 네루다의 시가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든 뜨거운 열정의 시간을 통과한 사람이라면 이 한 줄 시구에 공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만 3년을 넘긴 전라남도 강진의 유일한 사회적기업 해들녘애는 실패로부터 재탄생했다. 17일 만난 박상선 해들녘애(www.hdemarket.co.kr) 대표는 실패와 상처를 성공담보다 먼저 들려줬다.

박 대표가 잘 다니던 서울의 직장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내려온 가장 큰 이유는 아들의 병 문제였다. 수술을 앞두고 있었지만, 같은 병을 가진 다른 환자의 수술 예후를 보면서 선뜻 아들의 수술을 결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곳을 찾았다. 적어도 아들에게는 좀 더 나은 환경을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낯선 곳에서 직장을 잡았지만, 입사한 회사마다 연이어 부도를 겪었다. 그리고 길을 돌아서 운명처럼 사회적기업과 만났다.



박상선 '해들녘애' 대표. 해들녘애는 '반건조 호박 고구마 말랭이'와 '강진 여주'를 생산 가공해 판매하는 사회적기업이다. 박상선 '해들녘애' 대표. 해들녘애는 '반건조 호박 고구마 말랭이'와 '강진 여주'를 생산 가공해 판매하는 사회적기업이다.


◇혹독한 수업료

사회적기업이라는 '프리미엄'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사회적기업을 잘 모르는 이들은 그저 정부 지원을 받아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나눠주는 '가내 수공업'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사회적기업은 혜택이 아니라 더 좋은 품질로 일반 기업과 경쟁해야 하는 '기업'이다. 또 사회서비스를 수행하고, 더 높은 도덕성을 겸비해야 하는 복지기관의 성격을 겸비할 것을 요구받는다. 혹여 실수라도 하면 '사회적기업이 왜 저 모양이냐'는 가혹한 비난이 돌아온다. 제품 품질이 미흡할 때는 '사회적기업이 그렇지 뭐'라는 편견을 감수해야 한다.



해들녘애는 농산물 유통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유통으로 수익을 남기기는 어려웠다. 작년 매출이 총 7억 원을 넘겼지만, 중간 수수료를 제외하고 나니 남은 돈은 거의 없었다. 밖에서는 직원들 월급도 나라에서 지원하고, 매출도 웬만큼 나오는데 무슨 걱정이냐는 눈치였다. 2년째 110만 원으로 책정한 사장 월급도 받아가지 못할 만큼 수익률은 높지 못했다.

그래서 도전한 게 농산물을 직접 생산하고 가공하는 일, 그리고 완제품으로 판매까지 하는 일이었다. 유통만으로는 사회적기업으로서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농업기술센터와 협의하고, 발품을 팔아 대학교수들과도 자문 협력관계를 맺었다. 조금씩 길이 보였다. 그렇게 태어난 상품이 '반건조 호박 고구마 말랭이'와 '강진 여주'다.

◇특산품 없는 강진의 '강진 여주'


인구 4만의 전라남도 강진은 딱히 특색이 없는 지역이다. 이렇다 할 관광지도 없고, 큰 기업이 자리하고 있지도 않다. 강진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강진에서 밖으로 나가면 성공해도, 밖에서 강진으로 오면 망한다.' 그렇게 별 특색 없는 지역임에도 텃세는 아주 심한 편이다. 특색 없는 지역의 무색무취가 완고함으로 변한 것일까. 박 대표는 강진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외지인이다.

그래서 선택한 품목이 여주와 고구마라고 했다. 농업기술센터가 먼저 전략 식품으로 여주를 선정했다. 당시 유통에 주력했던 해들녘애는 농업기술센터 측으로부터 유통을 부탁받았다. 내친김에 직접 생산에 뛰어들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강진 여주'가 나왔다. 굳이 '해들녘애 여주'가 아니라 '강진 여주'라고 이름 붙인 이유가 있다. 특산물 없는 강진의 새로운 특산물로 자리매김하고 싶다는 포부다.

여주? 아직 잘 알려진 식품은 아니다. 생김새는 오이나 애호박을 닮았는데, 표면에 돌기가 있다. 영어 이름(bitter melon)에서 알 수 있듯, 맛이 쓰다. 우리말 별칭으론 '쓴오이'. 주로 말려서 차로 마시고, 진액을 음용한다. 그밖에도 전이나 볶음, 또 삼계탕에 삼 대신 넣어 먹을 수도 있다.

여주의 원산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현재는 일본의 특산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오키나와 지방에서 예로부터 많이 먹는 식품이 여주라고 한다. 오키나와는 암, 뇌졸중, 심장병 등의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아주 적고, 세계적으로도 유독 장수하는 이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특히 여주는 항암효과와 당뇨병에 대한 치료 및 예방 효능이 실험을 통해서도 인정됐다. 여주가 나는 여름철에는 신선제품을 판다. 그 외 계절엔 차, 진액, 말린 여주 등 가공제품으로 판매한다.

◇고구마 말랭이를 선택한 이유

고구마? 더 특색 없는 식품이다. 왜 굳이 고구마를 전략 상품으로 선택했을까. 박 대표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우선 강진의 고구마가 특히 품질이 좋다는 점. 둘째, 고구마 말랭이가 초기 시장이라는 점. 끝으로 사회적기업의 일자리 창출에 딱 맞는 식품이라는 점. 이 세 가지가 고구마를 선택한 이유다.

특히 고구마를 가공하고, 완제품으로 만드는 일은 기계가 대신하기 몹시 어려운 일이다. 일일이 삶은 고구마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겨 내야하고, 그 물렁물렁해진 고구마를 잘 다듬은 뒤에 다시 먹기 좋은 형태로 잘라내야 한다. "대기업이 진출하기 어려운 상품"이라고 박 대표는 말했다. 사람 손길이 필요한 노동집약적인 작업이다. 특성상 사업이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고용창출이 이뤄질 터다. 지역의 고용 창출이라는 사회적기업 지원의 정책 목표와도 잘 부합한다.

그 고구마 말랭이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현장을 답사했다. 밖에서 보기엔 허름한 창고였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아주 깔끔한 식품 가공 공장의 모습이었다. 15명의 직원은 모두 위생모와 위생 장갑, 위생복으로 '완벽 방어' 상태였다. 일차 가공을 맡은 직원들과 최종 고구마 커팅과 건조를 담당하는 직원 2명이 업무를 분담했다. 외부 출입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지만, 특별히 양해를 구해 간이 위생복을 입고, 현장의 모습을 찍었다.

'해들녘애' 최고령 직원 박현자씨(67)가 고구마를 손질하고 있다. '해들녘애' 최고령 직원 박현자씨(67)가 고구마를 손질하고 있다.
작업장은 해썹(HACCP, 위해요소 중점관리기준)을 충족할만한 높은 위생 상태를 보여줬다. 하지만 작년에 신청한 해썹 지정은 후보자들이 밀려서 아직 공식 검사를 받지 못한 상황이라고 한다. 이제 해썹 지정 사업장에서만 배추를 가공할 수 있기 때문에 절임배추 가공업체 쪽에서 신청이 폭주한 때문이라고 박 대표는 설명했다.

◇해들녘애 고구마 말랭이의 경쟁력

현재 해들녘애의 주력 상품은 여주와 고구마 말랭이다. 여주는 당뇨병에 특히 효능이 있다지만, 고구마 말랭이라니 너무 평범한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고구마 말랭이의 경쟁력을 물었다. 돌아온 답은 "조금이라도 문제점이 발생하면 포장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답변이었다. 그것만으로 경쟁력이 생길 수 있을까? 이번엔 정말 궁금해져서 좀 더 자세히 질문했다.

해들녘애 고구마 말랭이는 가공방법이 다른 곳에서 생산하는 고구마 말랭이와는 좀 다르다고 했다. 보통 고구마 말랭이는 일차적으로 찐 고구마를 손짓하고, 다시 그 고구마를 먹기 좋게 자른 뒤에 '다른 장소'에서 건조한다. 해들녘애 고구마 가공 과정은 이와 다르다. 다른 건조 장소로 이동하지 않는다. 작업장에서 바로 건조하고, 곧바로 진공포장까지 일체형으로 작업이 이뤄진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통상의 방법으로 고구마를 가공할 때는 건조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고구마가 오염될 수 있지만 한 공간에서 일괄 처리 방식으로 작업하면 그런 위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 즉, 식품을 좀 더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직접 확인한 작업장 모습도 박 대표가 설명한 작업과정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외부 전문가에게도 적극적으로 도움과 협력을 구하고 있다. 고구마 말랭이의 품질 향상을 위해 조미숙 이화여대 식품영향학과 교수가 함께 과제 수행을 준비 중이다. 여주와 관련해선 김경옥 동신대학한방병원 교수가 자문의원으로서 여러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

◇직원들에게 주식을 무상증여한 이유

이른 아침 고속버스를 타고 정오에 못 미쳐 도착했던 취재 일정은 벌써 오후 4시 40분을 지나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박 대표가 자신의 영업용 자동차로 손수 바래다줬다. "이 차는 새 차 같은데 얼마나 뛰었어요?" 박 대표가 답했다. "6개월 동안 2만 8천 Km를 뛰었어요."

박대표는 전라남도 사회적기업의 멘토로 직접 백화점과 부딪혀 전남 지역의 사회적기업들을 대신해 판로를 개척했던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줬다. 박 대표의 자랑스러운 '무용담'이었다. '무대포 정신'이라는 표현도 썼다.
그런 박 대표이기에 차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은 것을 불문가지. 사무실과 가공 공장에 있는 시간보다는 외근으로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훨씬 많다고 했다.

박 대표는 직접 차를 운전해 직원들의 아침저녁 출퇴근을 돕는다. 외근이 많다 보니 직원들과 자주 이야기할 기회가 없다는 박 대표. 공장에서 먼 곳에 사는 직원 6명의 출퇴근을 손수 맡아 하면서 직원들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눈다. 회사 이야기도 하고, 소소한 일상 이야기도 한다. 직원의 주인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박 대표는 기존 사업을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하면서 주식 절반을 직원들에게 무상증여하기도 했다.

해들녘애는 해가 뜨는 들녘을 상징한다. 그 해 뜨는 들녘은 아주 오랜 밤과 새벽의 차가움을 견딘 뒤에야 볼 수 있다. 전라남도 강진의 유일한 사회적기업인 해들녘애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통해 일어서는 방법을 배운 기업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