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살 것처럼 느긋하고, 당장 죽을 것처럼 강렬하라

머니투데이 김영권 작은경제연구소 소장 2014.01.2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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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에세이] 매 순간에 당신의 전부를 걸어라

생각할 때는,
마치 그대의 생각 하나하나가 불로 허공에 새겨져 그 생각을 주시한다고 생각하라.
사실이 진정 그러하기 때문이다.
말할 때는,
마치 그대의 말 하나하나를 전 세계가 하나의 귀인 것처럼 일심으로 듣고 있다고 생각하며 말하라.
사실이 진정 그러하기 때문이다.
행동할 때는,
마치 그대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대 머리 위에서 반동하는 것처럼 행동하라.
사실이 진정 그러하기 때문이다.
원할 때는,
마치 그대가 소망 자체인 것처럼 원하라.
사실의 진정 그러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는,
마치 신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그대의 삶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라.
사실이 진정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아름답고 심오하다. 이 글을 가슴에 담고 살자. 매 순간 나의 전부를 던지자. 집중하고 몰입하자. 생각할 때는 내 생각 하나하나가 허공에 불로 새겨져 내 생각을 주시할 것이다. 말할 때는 내 말 하나하나를 전 세계가 하나의 귀인 것처럼 듣고 있을 것이다. 행동할 때는 내 행동 하나하나가 내 머리 위에서 반동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이 진정 그러하기에. 나를 통해 신이 살고 있기에.



복사판으로 읽는 '미르다드의 서'

이런 가르침을 준 분은 레바논 출신의 작가 미하일 나이미다. 그는 '미르다드의 서'라는 책에서 이 글을 썼다. 하지만 나는 오쇼 라즈니쉬의 다른 책에 이 글을 처음 접했다. 그 책이 '사랑, 자유, 그리고 홀로서기'였는데 오쇼는 여기서 미하일 나이미를 극찬한다. 어떤 심오한 영감의 채널이 열리지 않는 한 이렇게 높은 경지의 글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 한다. 내가 쓸 것을 그가 이미 써버렸기에 그에게 질투를 느낀다고 한다. 그가 쓴 것은 가공의 소설이 아니라 성스러운 경전이라고 한다.



오쇼가 질투한 그 책, '미르다드의 서'를 요즘 읽고 있다. 원래 이 책은 1995년 장순용 역으로 정신세계사에서 펴냈는데 절판돼 살 수가 없다. 도서관에도 없어 구할 수 없었는데 운 좋게 복사한 것을 빌렸다. 요즘 같은 첨단 디지털 시대에 낱장을 일일이 복사한 책을 읽으니 감회가 새롭다. 전두환 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대학시절이 생각난다. 그때 김지하의 '오적'도 너덜너덜한 복사판으로 읽었는데 그 김지하는 어디로 갔을까.

그런데 막상 책을 잡으니 진도가 안 나간다. 같은 레바논 출신으로 문학적 동지였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연상시킨다. 내가 이 두 권의 책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듯이 '미르다드의 서'도 좀처럼 읽히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영적인 감수성이 부족하다. 영혼의 빛이 희미하다.

'미르다드의 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극복을 희구하는 자에겐 등대이자 항구.
그 밖의 사람들에겐 이 책을 조심하도록 일러라!

내가 바로 '그 밖의 사람'인가 보다.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고, 잘못 읽으면 탈이 날 사람인가 보다. 이런 염려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만족하기로 했다. 이 책의 어느 한 구절이라도 나를 흔들어 정신이 번쩍 뜨이게 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은 하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미적지근하게 산다. 시골에 와서 느리게 살기로 했지만 사실은 게으르다. 느림을 빙자한 나태다. 느릿이 아니라 느슨이다. 공부와 삶과 글을 하나로 일치시키겠다고 다짐했지만 말 뿐이다. 공부도 적당, 삶도 적당, 글도 적당이다. 나는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않는다. 몰입하지 않는다. 나를 다 던지지 않는다. 대충대충이다. 나는 이렇게 뜨뜻미지근하다 말 것이다. 100°C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마음에 박힌 얼음과 가슴에 서린 냉기를 녹였지만 그 물은 따뜻하지 않다. 뜨겁지 않다. 부글부글 끓어 하늘로 오르지 못한다.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은 하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미르다드는 "시간에는 망각이 없다"고 가르친다. "시간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시간에 기억된 모든 것은 공간 속의 사물에 깊이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그대가 밟고 있는 대지, 그대가 호흡하는 공기, 그대가 머무는 집은 만약 그대가 그것을 읽어낼 만한 힘과 그 의미를 파악할 만한 예민함이 있다면, 그대 과거의 생, 현재의 생, 미래의 생의 기록을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즉각 그대에게 밝혀줄 것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 우발적인 일은 없다. 어떤 일에도 틀림이 없고, 어떤 것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전능의 의지'에 의해 모든 사건이 정해져 있다."

그러니까 우연은 없다. 모든 것은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내 기억이 보잘 것 없고 제멋대로여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내 오감의 창은 얼마나 좁고 조잡한가? 내 의식의 빛은 얼마나 여리고 희미한가? 무지의 바다를 헤매는 나만 모를 뿐,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단 한 조각도 인과의 그물망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내 생각 하나하나가 불로 허공에 새겨져 그 생각을 주시한다는 것은 비유가 아니다. 내 말 하나하나를 전 세계가 하나의 귀인 것처럼 일심으로 듣고, 내 행동 하나하나가 내 머리 위에서 반동하고 있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 그러하다.

'우연한 기회'는 현명한 자의 장난감, 어리석은 자는 '우연한 기회'의 장난감

그러니까 나는 매 순간 속으로 100% 들어가야 한다. 생각과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나의 전부를 실어야 한다. 모든 것은 기억되고, 연결되고, 되돌아온다. 우연은 없다. 그렇게 보일 뿐이다. 미르다드는 말한다. "'우연한 기회'는 현명한 자의 장난감이다. 어리석은 자는 '우연한 기회'의 장난감이다."

2014년 새해를 맞아 나는 이 가르침을 가슴에 담는다. 나는 작은 것으로 살 수 있게 됐으나 넘치지 못한다. 나는 소소한 즐거움을 알았으나 환희를 모른다. 나는 느림의 행복을 누리지만 게으르다. 나는 깨닫고자 하나 치열하지 못하다. 나는 질기지만 굳세지 않다. 나는 생을 불태우지 않은 채 허송세월 하고 있다. 삶의 언저리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아몬드나무를 심고 있는 한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아흔을 넘긴 듯하다. 그는 꼬부랑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어찌 나무를 심느냐고 묻는다. 노인은 답한다. "오냐, 나는 죽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이에 조르바가 대꾸한다. "나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살고 있군요."

어느 쪽 말이 맞는가? 온전한 삶은 이 두 가지의 통합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느긋하고, 당장 죽을 것처럼 강렬하라. 매 순간에 전부를 걸어라. 그렇지 않은 삶은 불구다. 절름발이다. 나는 지금 이리저리 뒤뚱거리며 반쪽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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