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雜s]'미생' 윤태호는 어떻게 장그래를 만들었을까

머니투데이 김준형 기자 2013.10.26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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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40대 남자가 늘어놓는 잡스런 이야기, 이 나이에도 여전히 나도 잡스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40대의 다이어리입니다. 몇년 있으면 50雜s로 바뀝니다. 계속 쓸 수 있다면...

미생 윤태호 작가 미생 윤태호 작가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고 양치질하며 한숨을 쉰다.
왜? 회사 가기 싫으니까.
8시50분에 회사 앞에 도착해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담배를 한대 피우며 한숨을 쉰다.
왜? 회사 가기 싫으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엔 먼저 탐색을 한다.
왜? 임원들하고 같이 타기 싫으니까.
(같이 탔다가 "자네 이름이 뭐지?, 요즘 뭐하나?" 이런 시덥잖은 질문에 답을 못했다간 곧바로 상사한테 연락가서 깨지니까.)
회사 도착해선 탕비실에 가서 커피를 한잔 한다.
왜? 일하기 싫으니까.

'미생'의 윤태호 머릿 속에 들어있는 회사원의 하루 시작이다..
회사 생활이라고는 하루도 해 본 적이 없는 만화쟁이가 어떻게 '미생'의 장그래를 그려냈을까. 25일 머니투데이 편집국 워크숍에 강사로 나선 그에게서 답을 들었다.



평소에 만나는 출판사 사람들은 다 명함에 '부장'이라고 찍고 다니고, '과장'이라는 사람들은 별로 본 적이 없어서 과장이 부장보다 높은 줄 알았다는 그였다. 그래서 회사원의 일상을 객관화시켜줄 수 있는 '취재원'을 찾아가 몇시간이고 묻고 또 묻고, 녹음한 대화록을 한자 한자 적었다.(미생을 탄생시키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그 '회사원' 임OO씨는 여전히 그림자로만 존재한다. 왜? 회사 짤리면 안되니까)

그가 머니투데이 기자들에게 보여준 취재 프로파일의 극히 일부.



대리-일을 가장 많이 한다.
과장-이직 고민이 많다. 회사에선 잡으려고 한다
차장-애매한 위치. 이직하기 힘들어진다.
부장-이직하긴 늦은 나이. 처신을 조심한다. 인맥을 많이 쌓아둔다
사원-과장 직원편, 과장-부장 회사편
사원-부장까지는 이야기가 통한다.

이런 식이다. 유치하다고? 정작 회사를 다니는 우리는 한번도 긁적거려 본 일이 없는 우리의 모습이다.

회사를 안 다녀본 그이기에 취재는 더욱 디테일하다.


회사 가면 맨 처음에 뭐해요?
열쇠를 서랍에 꽂고 노트북을 꺼내요.
왜 노트북은 서랍에 있죠?
회사 것이니까요.
회사 것은 집에 안 가져가나요?
집에 가져가면 일을 집에서도 하게 되니까. 그리고 내 노트북은 따로 있으니까.
그럼 노트북은 누가 줘요?
회사에서요.
회사 누가 줘요?
장비 담당 부서에서요.
언제 줘요?
입사한 첫날요.
가져다 주나요, 자기가 가서 받나요?
케이스바이 케이스. 나는 가서 받았어요.
누구한테 달라고 하죠?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한테 말하면 돼요. '저 신입사원인데요...'라고 말하고.
근데 탕비실 관리는 누가해요?
총무과에서 해요.
탕비실에는 뭐가 있어요?
커피 율무차 녹차,,이런것들이 있어요.
그럼 손님이 오면 누가 커피나 먹을거 타다 줘요?
그때그때 달라요.
부장 손님이 와도 부장이 직접 타나요?
우린 알아서 눈치껏 타와요.

아~ 정말 이렇게 물어보는 선수 만나면 누군들 짜증나겠지만, 윤태호는 이렇게 물어보면서 취재를 했다(주요 취재원인 임OO씨가 참 대단하다)
종합상사 계약직 직원 장그래는 이렇게 탄생한다.

'이끼'도 마찬가지.
머리가 깨질것같은 만화 스토리텔링의 원형(본인은 이런 소리 듣는게 미안하다고 했다.)으로 꼽히는 이끼의 주인공들을 창조하기 위해 그는 140명이 넘는 캐릭터들이 출생이후 지나온 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쭉 정리한 연표를 나이별로 만들어 둔다. 그때를 살아간 사람들이 겪었을 상황을 머릿속에 상상하는 거다.
"100장의 파일중 캐릭터에 표현되는 내용은 겨우 1장 정도입니다"
별것 아닌 것 처럼 보이는 무심히 지나치는 대사 한마디도 그렇게 깨알처럼 적어둔 디테일에서 탄생한 것이기에 펀치력이 있다.

생각날 때마다, 들을 때마다, 어디에서건...그렇게 적어놓고, 사이사이에 추가한다.
그래서 엑셀과 에버노트는 하느님 오른편과 왼편에 앉아 있을 자격이 있는 발명품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둔 메모 사이사이에 내용을 추가하고 순서대로 정리하고 추려낼수 있고(엑셀), 컴퓨터 휴대폰이 모두 연동돼 언제건 생각을 메모할 수 있기 때문(에버노트)이다.

바둑 실력도 가장 잘 했을때가 7급, 지금은 10급 밖에 안된다는 윤태호이지만, 기원을 찾아다니며 프로 입단이 좌절된 '바둑천재'들의 이야기를 조각조각 붙여냈기에 장그래의 탄생이 가능했다.

윤태호는 창작물은 독자와의 '에너지 쟁탈전'이라고 했다. 작가는 독자에게 에너지(혼)를 빼앗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려면 그만큼 밑천이 많아야 한다. 그의 밑천은 취재와 상상력, 그리고 그것들 세세히 적힌 파일이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기꺼이 그 많은 시간과 돈과 정열을, 회사 한번 안 다녀본 그가 그려낸 '미생'에 헌납했다.

오늘도 회사에 다니고 있는, 그리고 수십년 회사를 다닌 우리는 언제 한번 이렇게 디테일하게 자기 삶과 일을 접해본 적이 있는지..반문해 볼 일이다.

가끔 후배들하고 현장 취재를 가면, 감탄(?)할 때가 있다.
취재원은 열심히 말을 하는데 받아 적지를 않는다. 수첩에 받아 적으면 취재원이 긴장하게 될까봐 우려해서 그러는 거라면 이해가 가지만, 그게 아니다. 그정도는 다 아는 이야기라는 거다.
그러다보니 나오는 기사가 현장감이 없고 회사 소개 팸플랫과 별 차이가 없다.

몇번 가본 곳이라도, 그때 마다 만나는 사람이 다르고, 하는 이야기가 다른데 말이다. 말하면서 언제 웃음을 짓고 목소리를 높이고, 얼굴을 찡그리는 지가 그때그때 각각이다. 책상위에 놓여져 있는 서류나 사물이 다르고 벽에 붙여져 있는 표어가 달라지는데.

폼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인터뷰할 때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서 타자 치는 것도 그런 면에서 '꽝'이다.
수첩에 손으로 적을때는 이야기하는 사람과 현장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둘 수도 있고, 중요한걸 별표 쳐 두거나 각주를 적어둘 수도 있는데, 노트북은 그저 자음과 모음을 '타자'할 뿐이다.(탁탁탁,,하는 노트북 타자 소리가 사람을 경직되게 만드는건 둘째 치고).

"먼지같은 일을 하다 보니 먼지가 돼 버렸어요"
직장인의 가슴을 후벼 파는 이런 미생의 대사는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관찰과 기록에서 나온다.
디테일을 수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은 경쟁력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은, 뒤집자면 '파워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다.
윤태호의 미생, 그리고 장그래가 독자들에게 먹힌 건 디테일을 건져낸 '취재' 때문이다.
허영만 문하생으로 들어 갔던 윤태호는 이제 문하생을 거느리고 일한다.
돈도 벌기 시작했다. 그래서 '돈도 디테일에 있다.'

↑ 25일 머니투데이 편집국 워크숍에서 강의중인 윤태호 작가. 화면에 띄워놓은 것이 '이끼' 캐릭터들의 특징과 성장과정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적어 놓은 엑셀 파일/출처=황국상 기자 페이스북↑ 25일 머니투데이 편집국 워크숍에서 강의중인 윤태호 작가. 화면에 띄워놓은 것이 '이끼' 캐릭터들의 특징과 성장과정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적어 놓은 엑셀 파일/출처=황국상 기자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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