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세트에서 스마트폰까지, 소리를 평정한 이 회사

머니투데이 실리콘밸리=유병률 특파원 2013.06.10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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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률의 체인지더월드] <51> 세계적 음향기술회사 ‘돌비’ 탐방

돌비에서 30여년간 서라운드 음향을 개발해온 엔지니어 마크 데이비스. 올해 67세인 그는 "세계 최고의 소리를 만든다는 열정으로 여전히 재미있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유병률기자   돌비에서 30여년간 서라운드 음향을 개발해온 엔지니어 마크 데이비스. 올해 67세인 그는 "세계 최고의 소리를 만든다는 열정으로 여전히 재미있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유병률기자


허연 백발 휘날리는 노(老) 엔지니어의 모습은 IT메카 실리콘밸리라 해도 흔치 않다. 그런데, 이 회사만큼은 예외이다. 올해 67세인 마크 데이비스씨. 방음장치가 된 그의 작업실에는 빙 돌아가며 수십 대 스피커가 세워져 있다. 그는 "30여 년 이 곳에서 음향을 연구했다"면서 각종 소리를 들려주었다. "차이를 느껴보라"면서 말이다.

이곳에서는 한 달에 한번 꼴로 30년 근속 기념행사가 열리고, 종종 48년 전인 1965년에 입사한 창업멤버 퇴임식도 열린다. 퇴임의 이유도 '정년이 되어서'가 아니라, '이제 좀 쉬기 위해서'라고 한다.



바로 '돌비(Dolby)'이다. 회사의 로고가 마치 사운드기술을 뜻하는 일반명사가 돼버린 곳. 브랜드 파워가 인텔·마이크로소프트와 맞먹는 회사.

돌비는 카세트 테이프에 소음을 제거하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왼쪽 아래 돌비 로고가 보인다.  돌비는 카세트 테이프에 소음을 제거하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왼쪽 아래 돌비 로고가 보인다.
그 옛날 카세트 테이프에서부터 CD플레이어, DVD플레이어, 극장, 홈씨어터, TV, 지금은 태블릿PC와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소리가 나오는 모든 단말기에 기술을 팔고 있다. 엔지니어는 나이 들어도 회사는 늙지도 않는다. 지난달 30일 샌프란시스코 남쪽에 위치한 돌비의 헤드쿼터를 찾아 그 비결을 들어보았다.



이 건물 3층의 세계최고 음향시설을 갖췄다는 극장. 샌프란시스코필하모닉이 녹음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오태호 모바일부문 상무는 작년 말 돌비가 선보인 음향기술 '돌비 애트모스'를 시연해 보였는데, 소리가 전후 좌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머리 위로 둥둥 떠다니는 느낌. 헬리콥터가 머리 바로 위를 휙 지나가는 듯했다. '브레이브' '호빗' '아이언맨3' 등 할리우드 40개 영화가 이 기술을 이용해 제작됐다.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3층짜리 돌비 본사 건물. 회사의 공식명칭은 '돌비 랩(연구소)'이다.  /샌프란시스코=유병률기자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3층짜리 돌비 본사 건물. 회사의 공식명칭은 '돌비 랩(연구소)'이다. /샌프란시스코=유병률기자
오 상무는 돌비가 50여 년간 명품브랜드를 유지해온 비결이 "돌비를 중심으로 에코시스템(생태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화 노래 드라마 등 콘텐트를 만들 때부터 돌비 기술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이 소리를 그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단말기 역시 돌비 기술을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할리우드의 제작자나 가수들과 협업을 하죠. 의도하는 소리를 변질 없이 그대로 구현해 보자는 것이지요. 엔지니어들이 파견돼 함께 일합니다. 돌비 애트모스도 영화감독들과 더 좋은 소리를 찾다 보니 개발된 것이고요."


그래서 돌비는 지금껏 아카데미상(음향부문)만 10차례, 에미상은 14차례나 받았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열리던 코닥극장도 올해부터는 돌비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돌비기술은 콘텐트 배급단계에서도 적용된다. 제작단계에서의 소리가 그대로 보존되려면 방송사나 유니버셜 같은 영화배급사, 무선망 사업자 등 배급회사들도 돌비기술을 채택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제작·배급 단계에서 돌비는 굳이 돈을 벌지 않는다.

오히려 돌비의 수익원은 콘텐트 소비단계이다. 극장이나 게임기, TV, PC, 모바일 등 단말기 제조사가 단말기를 팔 때마다 돌비에게 지급하는 라이선스이다. 돌비기술을 이용해 제작되고 배급되는 콘텐트를 온전히 소비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단말기 회사들은 돌비 기술을 채택하는 것이다.

돌비 본사에서 모바일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오태호 상무. 그는 "콘텐트 생산-배급-소비 등 모든 단계에 돌비기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이 전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돌비의 신념"이라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유병률기자   돌비 본사에서 모바일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오태호 상무. 그는 "콘텐트 생산-배급-소비 등 모든 단계에 돌비기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이 전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돌비의 신념"이라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유병률기자
오 상무는 "소리와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회사는 우리의 파트너이자, 고객"이라고 말했다. 퀄컴이 만드는 모바일 칩셋,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즈 운영체제에도 돌비의 소리기술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이들 기업까지도 돌비의 고객이다.

그래서 돌비의 생태계는 아예 경쟁사가 나올 수도 없도록 만드는 구조이다. 오 상무는 "물론 각 단계, 각 분야마다 소규모 경쟁자들이 있긴 하다"면서 "하지만, 제작 배급 소비를 다 포괄할 수 있는 경쟁사는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돌비는 돌비기술을 사용하느냐 아니면 다른 회사 기술을 사용하느냐가 아니라, 돌비기술을 사용하느냐 아니면 사용하지 않느냐의 선택으로 만들어버린다.

샌프란시스코 돌비 본사 3층의 세계최고 음향시설을 갖춘 극장. 샌프란시스코 필하모닉이 이곳에서 녹음을 한다. /샌프란시스코=유병률기자  샌프란시스코 돌비 본사 3층의 세계최고 음향시설을 갖춘 극장. 샌프란시스코 필하모닉이 이곳에서 녹음을 한다. /샌프란시스코=유병률기자
돌비는 스마트폰 시장이 커지면서 모바일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스마트폰을 통해서도 서라운드 음향을 즐길 수 있도록 한다는 것. 삼성의 갤럭시 시리즈 등에 돌비 기술이 채택되면서 스마트폰 시장 자체가 화질경쟁에서 음질경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돌비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장이 열린 것. 새로운 디바이스가 계속해서 나올수록 돌비의 생태계는 오히려 더 확장되는 것이다.

오 상무는 "우리가 독점인 것이 아니라, 원천기술을 기기에 맞게 계속 발전시키다보니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드웨어가 없는 것이 한계 아닌가'라는 질문에 그는 "우리가 하드웨어 업체를 경쟁자로 만들기보다는 이들 모두 우리고객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돌비는 실리콘밸리 기업치고는 독특한 회사이다. 모두가 플랫폼을 지향할 때 돌비는 정반대의 개념, 즉 그것이 어떤 디바이스, 어떤 서비스이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원천기술을 지향한다. 그리고 또 하나, 사운드에 '미친' 사람들이 자연 그대로의 소리를 재생하기 위해 백발이 되도록 평생을 바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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