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들 '숙제 논쟁'과 공약가계부

머니투데이 세종=박재범 기자 2013.06.07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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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범의 브리핑룸]

엄마 아들 '숙제 논쟁'과 공약가계부


열 살인 아들은 엄마와 매일 옥신각신한다. 숙제 먼저 한 뒤 놀라는 엄마와 놀고 와서 숙제하겠다는 아들의 '논쟁'이다. 엄마는 혀를 찬다. "30분이면 끝낼 숙제, 빨리 해 치우고 놀면 되지 않아". 맞는 말이다.

아들도 할 말은 있다. "친구들과 놀기로 했는데 숙제 하고 나가면 친구들이 없잖아요". 수긍이 간다.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충분히 조급해질 만 하다. 이 논쟁은 '역사적'으로 되풀이된다. 간혹 엄마의 '원칙'과 아들의 '타이밍'이 맞을 때가 있긴 하다. 한쪽의 '양보'로 끝날 때도 있지만 이 역시 이례적이다.



고성이 오가기도 한다. 목소리가 높아질 경우엔 십중팔구, 아들의 패배다. 눈물을 훌쩍이며 책상머리에 앉아야 한다. '학생의 본분' '기본이 먼저' 등 엄마의 원칙론을 무너뜨리긴 쉽지 않다. 다른 집안도 비슷하다. 어찌보면 시·공간을 초월한 문제다.

집안 얘기를 거창하게 한 것은 나라 살림에서 비슷한 모습이 떠오른 때문이다. 새 정부 출범 전후의 흐름이 엄마·아들 논쟁과 닮았다. 국가의 숙제는 국정 과제다. 어느 정부건 초기에 국정 과제를 정립한다. 정부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의미도 있다.



다만 박근혜 정부는 이전과 다르다. 과거엔 공약이 국정과제로 재탄생할 때 많이 걸러졌다. 재정 여건, 경제 상황 등이 고려됐다. '空約'이란 비판과 함께 현실을 반영한 '결단'이란 칭송도 나왔다. 반면 새누리당의 공약은 그대로 140개 국정과제가 됐다. 잡음도 거의 없었다.

모든 것은 여기서 출발한다. 재정 계획이나 세법 개정 등도 여기에 구속된다. 숙제를 어떻게 할지 시간표를 짜듯 공약 가계부까지 만들었다. 노란 색 표지의 두터운 책자인 그 가계부는 현 정부에겐 '성경'처럼 다가온다.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획재정부 등은 인수위 때, 공약 가계부를 만들 때 줄곧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공약은 공약으로 끝날 것"이란 이들의 기대는 "공약은 약속"이라는 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사라졌다. 언제나 그렇듯 현실론은 원칙론을 누르기 어려운 법이다.


약속은 중요하다. 공약을 지키기 위해 가계부까지 만든 열정은 역사에 남을 만하다. 헛된 공약의 남발을 막는 장치로서도 의미가 있다. 시험을 앞두고 공부 계획표를 짜는 것만큼 안심되는 일도 없다.

그만큼 걱정도 깊다. 140개 국정과제, 공약 가계부에 내포된 도그마의 함정 때문이다. 복지정책을 담당하는 한 관료는 이런 고민을 털어놨다. "이미 5년간 할 정책은 정해져 있다. 새롭게 할 것은 없고 그저 정해진 것을 묵묵히 하면 될 뿐이다. 집행이라도 제대로 하라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새 아이디어로 새 정책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

다른 관료도 "무엇을 하겠다고 하면 국정과제부터 확실히 한 뒤에 고민하자는 말부터 돌아온다"고 답답해했다. '숙제 논쟁 에서 엄마가 아들에게 하는 말과 비슷하다.

숙제와 달리 정책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교과서에서만 시험 문제가 나온다면 좋겠지만 현실 정책은 온갖 돌발 변수와 부닥치면서 풀어야 한다. 이미 원전 비리·사고, 출구 전략 가시화 등 대내외 돌발 변수가 터져 나오는데 '공약 가계부'만 뒤적거리는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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