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칼럼] 우리는 얼마나 속고 있는 걸까?

머니투데이 박정태 경제 칼럼니스트 2013.04.1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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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의미를 찾아서 <30>

#갑자기 엔론 스토
[박정태 칼럼] 우리는 얼마나 속고 있는 걸까?


리가 떠올랐다. 벌써 12년이나 지난 일이다. 2001년 이맘때 엔론은 1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EPS(주당순이익)가 전년 동기 대비 18% 증가하는 등 꽤 괜찮은 편이었고 연간 EPS 목표치도 1달러75센트에서 1달러80센트로 올려 잡았다.

그런데 실적 발표 후 가진 콘퍼런스콜에서 엉뚱한 사건이 벌어졌다. 한 애널리스트가 엔론의 대차대조표와 현금흐름에 의문을 제기하자 CEO(최고경영자)인 제프 스킬링의 입에서 "멍청한 놈!"(Asshole)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회사에서는 스킬링이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 혼잣말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시장은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연초에 90달러를 넘어섰던 엔론 주가는 양호한 실적 발표에도 불구하고 속절없이 하락해 10월에는 30달러대로 주저앉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10월16일 3분기 실적 발표에서 의문이 풀렸다. 일회성 손실로 10억1100만달러를 계상한 것이다. 그 결과 당초 3억9300만달러 흑자였던 분기 실적이 6억1800달러 적자로 돌변했다. 엔론 주가는 1주일 만에 25% 넘게 떨어졌다.

그 무렵 엔론을 상대로 집단소송이 제기됐다. 케네스 레이 회장을 비롯한 29명의 엔론 중역이 내부자 거래로 매각한 회사 주식이 10억달러가 넘은 것으로 밝혀졌다. 엔론이 가공 거래로 실적을 부풀렸고 회계법인 아서엔더슨이 분식회계를 눈감아준 사실도 드러났다. 엔론의 신용등급은 정크본드 수준으로 추락했다. 엔론은 마침내 11월30일 파산을 신정했고 그날 주가는 26센트로 마감했다. 2002년 1월16일 엔론 주식은 뉴욕증권거래소에서 퇴출됐다.



#나는 대학시절 학부 과정에 개설된 회계학 과목을 전부 이수했다. 회계원리에서 원가회계, 회계감사까지 8개과목쯤 됐던 것 같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숨겨놨던 수천억원대 손실을 어느날 갑자기 불쑥 계상하는 것과 고의적인 분식회계가 뭐가 다른 건지. 그것도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 계열 건설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건지.

회계의 기본은 정확한 장부 기록이다. 정확하지 않은 장부는 아무 쓸모도 없다. 수익과 손실 인식 시점의 차이는 그 다음 문제다. 감가상각이나 대손충당금 적립 기준에 따라 손익이 달라지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예상 가능하다. 그러나 부외(簿外) 자산이나 부외 부채를 숨겨둔다거나 가공의 수익과 손실을 장부에 기재하고 이미 발생한 수익과 손실을 고의로 누락했다면 그것은 정확한 장부가 따로 있었다는 말이 된다. 거짓 장부는 회사 내부자에게도 아무 쓸모없으니까.

#정말로 몰랐을까. 아무리 해외 사업장이라지만 적어도 CEO와 재무책임자는 알았어야 할 사안이다. 몇 해 전에 공사가 시작됐는데, 그것도 수천억원의 손실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를 알지 못했다면 경영자도 아니다. 매년 재무제표의 적정성을 감사하는 회계법인에서도 이 정도 손실은 파악했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신용평가기관이나 애널리스트들은 늘 뒷북만 쳐왔으니까 그냥 넘어가자. 한데 1주일도 채 안돼 이번에는 더 큰 재벌 계열 건설사가 똑같이 거액의 손실을 공표했다. 북한의 전쟁위협도 있고, 뭐 유야무야 넘어가는 분위기라 물타기하려는 것이었을까. 아무튼 허탈하고 조금은 우습기까지 하다.


#러시아 속담에 '제 낯짝 비뚤어진 줄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는 말이 있다. 니콜라이 고골의 희곡 '검찰관'은 이 속담과 함께 시작된다. 암행 검찰관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장을 비롯한 고위관리들은 허풍쟁이 하급관리 홀레스타코프를 검찰관으로 착각한다. 이들은 비리를 감추기 위해 가짜 검찰관에게 뇌물을 주고 연회까지 베푼다. 홀레스타코프는 한술 더 떠 시장의 딸과 결혼하기로 한다. 그러나 정체가 탄로나자 홀레스타코프는 유유히 떠나가고 경악한 고위관리들 앞에 진짜 검찰관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시장은 웃는 관객을 향해 외친다. "뭐가 우습나. 결국은 자기를 보고 웃는 거 아닌가." 어쩌면 홀레스타코프보다 시장보다 더 우스운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일지 모른다. 정말 우리는 얼마나 속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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