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오늘(4월 16일), 아우슈비츠 초대 수용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가 자신이 수용소장을 지낸 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루돌프 회스.
1941년 8월 친위대(SS)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가 수용소를 방문해 뜻밖의 지시를 내렸다. "총통은 유태인들에 대해 '최종 계획'이라는 결단을 내렸다"며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유태인 절멸 용도로 개축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회스는 훗날 "이 명령에는 무언가 비정상적인 부분이 있었다"면서도 "나는 굳이 심사숙고를 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명령이니까, 실행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증언했다.
◆아우슈비츠의 초대 수용소장을 바로 그 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
이에 1941년 10월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가스를 통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특별히 집행자들의 양심적 가책이나 정신적 부담을 가볍게 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회스 본인부터가 "학살이 시작된 뒤 나는 일에서 행복감을 찾지 못했다. 나는 부하들을 믿을 수 없었고, 상관들은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으며 내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며 "모두들 '소장만 호의호식한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사실 나는 별로 선망할 것도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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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군에 의해 체포된 회스는 1946년 4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출석해 유태인 250만명 학살설을 주장했다. 5월 폴란드로 인도된 회스는 7월부터 크라쿠프에서 재판을 받기 시작해 이듬해 4월 2일, 폴란드 최고인민법원에 의해 사형이 선고되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부지내에 남아 있는 회스의 교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