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 2천만원 깎았는데, 100만원 때문에..

머니위크 지영호 기자 2013.03.2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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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 커버]주택거래 실종이 남긴 것들/ 계약서 쓰다가 "더 깎자"

일산에 사는 직장인 최수범씨(가명·38)는 회사에서 '칼퇴남'으로 통한다. 칼퇴남은 '칼 같이 퇴근하는 남자'라는 의미다. 그는 잔업이 있더라도 일주일에 한번 꼴로 일과시간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향한다. 그가 집으로 직행하는 까닭은 집을 팔기 위해서다.

최씨는 자녀의 양육 문제로 처갓집과 가까운 집을 구하기 위해 지금 살고 있는 전용 85㎡ 아파트를 팔아야 할 처지다. 올 초에 실거래가를 근거로 집을 내놨지만 문의가 없자 그는 지난달 시세보다 2000만원을 낮췄다.



가격을 낮추자 집을 보러오는 이들이 늘었다. 한달에 대여섯번 꼴이다.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고민이 생겼다. 주중에 찾아오는 매수자 때문이다. 주중 저녁이 아니면 집을 보러가기 힘들다는 매수자를 무시하기엔 그의 사정은 다급했다. 아내와 아기만 있는 집에 낯선 이를 들일 수 없었던 그가 선택한 것은 정시 퇴근이었다. 그가 칼퇴남으로 불린 이유다.

회사 상사의 눈치를 봐가며 집으로 달려오면 이제는 예비 매수자들의 눈치를 봐야 할 차례다. 집을 보러 오는 이들마다 하나 같이 집안의 문제들을 들추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안 구조가 답답하다거나 수압이 약하다는 식으로 결점 찾기에 혈안이다. 층간소음이 화두가 되면서 윗집의 가족구성이나 소음 발생 피해를 묻는 사례도 있었다.



그는 "매수자 우위 시장이라고 하지만 깐깐한 매수자의 입맛을 맞추기가 여건 어려운 것이 아니다"면서 "새로 들어가는 아파트의 인테리어 비용을 절감해서라도 빨리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직장 상사의 눈치와 매수자의 시달림을 견디다 못한 그는 결국 1000만원을 더 낮춰 3월 초 이 아파트를 팔았다.

사진_ 뉴스1 박세연 기자사진_ 뉴스1 박세연 기자


◆깎은 후 또 깎기는 기본

주택거래 부진이 계속되면서 매매가격이 오르지 않는 지역을 중심으로 매수자의 갑(甲) 행세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 주택매매시장에서 거래감소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이다. 흔히 부동산계약서 상에서 매도자 혹은 분양권자를 갑으로, 매수자 혹은 수분양자를 을로 표기하지만 실제 거래는 반대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서울 및 수도권의 중개업소를 통해 확인한 결과 최근 매수자가 주택거래계약에 앞서 요구하는 내용은 주로 가격인하다. 보통 실거래가 대비 2000만~3000만원이 기본이다. 협상과정에서 경매물건의 낙찰가까지 제시하며 몇천만원을 더 낮춰달라고 요구하는 이들도 있다.


분당구 서현동 D공인 대표는 "요즘 매수자들은 이미 중개업소에 오기 전 실거래가부터 시세조사까지 다 끝내고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시범단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분당 전지역을 훑고 다닌다"며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도 경매로 낙찰받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가격을 흥정하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동탄1신도시의 P공인 대표는 "이미 사전에 거래금액을 협의해놓고 계약서 작성과정에서 피치못할 사정을 토로하며 500만~1000만원 더 깎자는 사람도 있다"며 "간혹 100만원 차이로 기싸움을 벌이다 계약을 파기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양천구 목동 H공인 대표는 "매수자가 이사 날짜나 중도금, 잔금 일정을 통상적인 수준에서 벗어나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사례도 있다"며 "세입자에게 이사비용을 주고 내보내면 구입을 고려하겠다는 옵션을 걸기도 한다"고 전했다.

반면 강남 매도자의 콧대는 여전해 보인다. 개포동 T공인 대표는 "정부의 주거활성화 기대감과 재건축시장의 회복, 일부 부동산전문가의 바닥론 등이 힘을 받으면서 매도자가 급매물을 거둬 들였다"면서 "잠실 역시 1월 말 바닥을 찍으면서 시세가 5000만~7000만원 올랐다. 다른 곳은 몰라도 강남에서 매수자의 갑 행세는 끝났다"고 말했다. 개포동 재건축시장을 이끌고 있는 개포주공1단지의 경우 매달 30개 정도의 거래가 이뤄지고 있으며 대치·도곡·일원 등지도 온기가 돌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남수 신한은행 부동산팀장은 "일부지역에서 거래가 소폭 상승하면서 매도와 매수의 갭이 상당히 커졌다"면서 "강남권을 시작으로 매도자와 매수자의 힘겨루기 싸움이 시작됐다"고 진단했다.

사진_뉴스1 박지혜 기자사진_뉴스1 박지혜 기자
◆집 보러 온 매수자 "기저귀 어디다 버려요?"

그렇다면 매도자들은 최근의 주택거래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다고 생각할까. 포털의 유명 재테크 카페에서는 집을 내놓고 난 뒤 벌어진 다양한 사연을 찾을 수 있다. 황당한 가격 요구야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양측의 협의 하에 이뤄지는 거래계약과정에서 매도자가 주눅이 드는 분위기는 피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카페 회원 A씨는 "집 내놓고 나면 집을 항상 깨끗하게 치워놓고 손님 대기모드로 살아야 한다. 더러우면 계약이 잘 안되고, 청소하겠다고 시간을 달라고 하면 그 사이 계약자들이 떠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포인트 벽지를 이용해 집 안을 예쁘게 꾸몄다"며 "매수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집 보러 온다고 하면 우리 부부는 물론이고 심지어 아이들까지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는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많은 회원들은 이 글에 '요즘 집 팔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며 동감했다.

다른 회원 B씨는 "오랜만에 집 보러 오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집에 사람이 없어 중개업자에게 현관 비번을 알려줬다. 그 뒤로 집 보러 오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면서 "혹시 우리 집이 낮에 사람 없다는 이유로 중개업소의 모델하우스가 된 건지 의심스럽다"고 불쾌해 했다. 그렇지만 주택 매도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공통된 반응이다.

매수자의 콧대가 예의를 넘어서는 수준까지 높아졌다고 토로하는 예도 있다. 다른 카페 회원 C씨는 "집 보러 와서 아이 기저귀 갈고 아이 씻긴다며 욕실까지 쓰고 갔다. 기저귀는 어디에 버려야 하냐고 묻는 센스까지. 최소한 자기들이 들고 나가 처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매수자의 태도를 지적했다. 또 회원 D씨는 "집 보러 온다고 해서 몸살 날 정도로 이틀 동안 대청소했는데 강아지 안고 와서 자기가 무슨 우리집 검사하러 온 사람처럼 고자세로 휙 둘러보곤 (인사도 없이) 갔다"며 혀를 찼다.

사진_뉴스1 박세연 기자사진_뉴스1 박세연 기자
■중개업소의 님비현상

취재과정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점은 중개업소의 님비(NIMBY)현상이다. 님비는 KBS 예능프로 <1박2일>에서 MC 강호동이 자주 외치던 '나만 아니면 돼'와 같은 의미다.

많은 중개업소 관계자들은 매수자 우위 시장에서 매수자의 행태를 알려달라는 질문에 '우리 지역은 그런 현상이 없다'고 응답했다.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매수자의 갑행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며 기자의 시선을 돌렸다.

강남의 한 공인중개사 관계자는 "가격하락이 이어지고 있는 곳에서 매수자 우위 시장이 발생하는데 대표적인 곳이 분당, 용인 수지, 죽전, 일산, 의정부 등이다"며 취재 방향을 잡아줬다. 반면 용인시 상현동과 서현동, 성복동의 부동산 관계자는 "상암동이나 은평뉴타운 등 서울 강북지역이나 일산 등지에서 매수자 우위시장이 뚜렷하다"며 화살을 돌렸다.

해당지역의 이미지가 매수자 우위시장으로 굳어지면 매도가 어려울 뿐 아니라 거래도 힘들어질 수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반면 중개사협회 등이 주장하는 부동산 거래 활성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들을 수 없었다. 거래활성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가 자칫 매수자 우위 시장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웠던 탓일까.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7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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