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을 꿈꿨던 '마무리 투수' 김석동

머니투데이 박재범 기자 2013.02.2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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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범의 브리핑룸]

# 투수의 꿈은 선발 투수다. 철저한 분업 추세로 중간 계투나 마무리 투수의 중요성이 높아지곤 있지만 선발투수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일정한 등판 시기는 몸 관리에 도움을 준다. 경기 운용의 모든 게 자기 어깨에 있다. 강약을 줄 수 있고 리듬을 탈 수 있다. 물론 책임과 영광도 자신의 몫이다.

반면 매일 대기해야 하는 구원투수는 육체적 피로도가 더 크다. 박빙의 순간, 마운드에 올라 감내해야 하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말할 것도 없다. 연봉 등 처우도 마무리가 선발에 못 미친다. 프로야구 한 시즌 최고의 선수인 MVP에 구원투수가 뽑힌 적이 없다는 게 좋은 예다.(한번 있긴 하다. 1996년 한화 마무리투수 구대성이 MVP를 탔다. 하지만 이해 구대성은 139이닝을 던지며 다승과 방어율 타이틀을 따냈다.)



# 구원투수, 마무리 투수는 힘들다. 소방수로 불을 껐다는 희열은 있지만 뭔가 허전하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을 여러 해 보면서 든 소회도 비슷하다. 김 위원장 이름 앞엔 항상 '대책반장'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큰 현안이 터질 때마다 항상 그가 있었다. 전면에서 진두지휘를 했다. 5.8 부동산 특별대책반장(1990년), 한보대책 1반장·금융개혁법안 대책반장(1997년) 등 셀 수 없다. 전문성과 추진력을 인정받은 결과다.

'대책반장'은 곧 '구원 투수'를 뜻한다. 실제 그가 만든 정책 제목을 보면 대부분 '안정 방안'이나 '정상화 방안'이다. 이는 곧 당시 상황이 '불안정'했거나 '비정상적'이었다는 의미다. 참여정부 때 만든 4.3카드 대책이나 신용불량자 대책, 각종 부동산 대책 등도 그랬다.



선발을 꿈꿨던 '마무리 투수' 김석동


이명박 정부는 3년간 야인으로 지냈던 그를 2010년 마지막날 호출한다. 그의 컴백은 곧 소방수가 필요한 상황을 뜻했다. 김 위원장의 주문은 명확했고 지시는 분명했다. 가계부채 대책이 제일 먼저였다. 외환 유동성에 대한 준비도 시켰다. 이 효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재정위기 악화 등 국제금융시장이 요동칠 때 확인됐다. 한편으로 부실저축은행 정리를 시작했다. 2년새 26개 저축은행의 문을 닫았다. 금융시장의 뇌관은 그렇게 제거됐다. 그 사이 2년이 훌쩍 지나갔다.

# 대책반장의 이번 등판도 기대와 어긋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진면목이 '대책반장'이란 타이틀에 가려져 있을 뿐 원래 탁월한 선발 투수감이라는 게 선후배 동료들의 평가다. 사실 금융실명제대책반장(1993년), 금융개혁법안 대책반장(1995년) 등을 보면 정책 세팅 능력이 확인된다. 추진력이 강조되면서 선이 굵다는 평을 듣는 김 위원장이지만 실제론 꼼꼼하고 디테일에 강한 관료다.

자본시장통합법도 옛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때 만들었다. 금융위원장을 맡은 뒤 불을 끄러 다니면서도 다른 손은 자본시장을 어루만지는 데 썼다. 헤지펀드 육성 방안을 만들고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내놨다. 지난해 가을 정기국회, 올 2월 국회 때 장관으로는 이례적으로 법안심사소위까지 참석, 의원들을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 하지만 여기까지다. '소방수+α'의 성과를 남기려했던 그의 꿈은 모두 이뤄지지 않았다. 구원투수의 한계다. 그래서 미련이 있다. 그는 "시간만 있었다면 금융산업의 지도를 다시 그려볼 수 있을텐데…"라고 아쉬워했다.
우린 좋은 선발투수를 좋은 마무리 투수로 활용했다. 우리가 처한 상황 탓이다.

김 위원장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부부의 진갑맞이 남미 여행도 계획돼 있다.
멕시코·아르헨티나·브라질·페루 등을 거치는 일정이다. 곧 세상에 나올 쌍둥이 손주도 안아야 한다. 그가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시장의 안정을 뜻한다.
그렇기에 그가 혹여 마무리 투수로 돌아온다는 것은 그에게나, 한국 경제에게나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에게 선발등판의 짐이 지워질 여지는 남아 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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