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당선인과 '멀리건'

머니투데이 박재범 기자 2013.02.08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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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범의 브리핑 룸]

골프에 멀리건(Mulligan)이란 게 있다. 미스 샷을 없던 것으로 하고 벌타없이 다시 치는 것을 뜻한다. 멀리건의 유래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다.

먼저 우정 얘기다. 친구 4명이 주말 아침 어김없이 모여 골프를 쳤다. 그중 드라이브를 가장 잘 치던 '멀리건'이란 친구가 사고로 죽었다. 이후 할 수 없이 3인 플레이를 하곤 했다. 죽은 친구 순서가 돌아오면 티샷이 마음에 안 들었던 멤버가 나섰다. "멀리건 샷은 내가 친다"면서.



아일랜드에 매상을 올려주는 손님에게 공짜 술 한병을 줬는데 그 공짜술을 '멀리건'이라고 불렀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얘기도 있다. 골프를 좋아하던 2명이 심심하던 차에 라커룸에 있던 청년을 꼬셔서 동반 라운딩을 했다. 골프를 잘 못 쳤던 이 청년은 실수를 남발하자 "자신은 실력이 안 되니 한번 더 치게 해 주쇼"라고 요구했다. 이 청년의 이름이 멀리건이었다.



아마추어 골퍼일수록 멀리건은 친숙하다. 그 바탕에 깔린 정신은 배려다. 친목이건 접대건 동반자에 대한 예의가 토대가 된다. 티샷이 OB(아웃오브바운드)가 났을 때 동반자들이 먼저 멀리건을 외쳐준다.

멀리건은 자신이 '갖는' 게 아니라 남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그 때 머리를 숙이며 겸손히 받는다.

재미없는 골프의 멀리건 얘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인사 과정을 보며 문득 멀리건이 떠오른 탓이다.


박 당선인이 새 정부 첫 총리 후보로 김용준 인수위원장을 지명한 게 지난 1월 24일. "(지명자가) 약자에 편에 서서 희망을 줘 왔다. 나라의 법치와 원칙을 바로 세우고 무너진 사회 안전과 불안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해소하고 국민행복 시대를 열어갈 적임자라고 생각한다"는 지명 이유도 덧붙여졌다.

그리고 불과 5일 뒤인 29일 김 지명자는 인수위 대변인의 입을 통해 자진 사퇴했다. 그로부터 9일이 지났다. 박 당선인은 공개적으로, 공식적으로 이에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과 오찬 회동 자리에서 인사 청문회에 대한 불쾌한 심경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질' 뿐이다.

지난 8일 새누리당 국회의원·당협위원장 연석회의에 참석 "청문회가 개인의 인격을 과도하게 상처내지 않고 실질적인 능력과 소신을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한다고 말한 게 전부다.

'신상털기식 검증' '가족에 대한 과한 압박' 등은 차제에 고민해 볼 만한 문제다. 하지만 선행돼야 할 게 있다.

바로 동반자에 대한 배려와 예의다. 박 당선인의 첫 인사는 어찌됐건 OB다. 과도한 검증 때문이건, 당선인의 부실 검증 때문이건 OB는 OB다. 헌데 "I'm sorry" 한마디 없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인사를 둘러싼 잡음이 있을 때마다 마이크를 잡고 '과하게' 설명하고 설득했다면 박 당선인은 반대로 과하다.

박 당선인은 아무 말없이 자연스럽게 티샷을 준비 중이다. 느릿느릿 몸을 풀고 있다. 마치 첫 인사를 하듯이 말이다. 그래도 멀리건은 멀리건이다. 그리고 멀리건을 치기 전 동반자에게 양해를 구하는 게 순서다.

그게 동반자에 대한 배려이자 예의다. 스스로에게 멀리건만 남발하는 것은 골프장에서도 꼴불견에 속한다. 멀리건을 그리 급하게 준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잠시 동반자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은 어떨까. 자칫 '불통' 이미지에 에티켓 없는 멀리건 이미지까지 덧씌워질까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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