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머니투데이 박정태 경제칼럼니스트 2013.02.0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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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의미를 찾아서 <25>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문득 뒤돌아보니 어느새 15년이 흘렀다. 나는 그때 신문사에서 자리를 옮겨 국제경제 뉴스를 다루기 시작했는데,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 가치가 급락했다는 기사가 내가 쓴 첫 기사였다. IMF 외환위기 폭풍이 거세게 몰아치던 1998년 1월, 몸보다 마음이 더 움츠러드는 시기였다. "무서운 계절, 겨울은 허공의 수분을 돌로 만든다."

#그러고 보니 오버랩되는 몇몇 장면들은 지금 상황과 꽤 흡사하다. 엔화 가치는 새해 벽두부터 6년만의 최저치인 달러당 134엔 대까지 떨어졌다. 1년 전의 110엔 대, 1995년 4월의 79엔 수준과 비교하면 당시 엔 저(低)가 얼마나 급격했는지 알 수 있다. 그 무렵 "미스터 엔"으로 불렸던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일본 대장성 재무관이 엔 저를 막으려 동분서주했던 것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1월 15일에는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이 미셸 캉드쉬 IMF 총재와 구제금융 합의문서에 서명하는 사진이 외신으로 들어왔다. 나는 기사에서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이 승전국 미국의 맥아더 장군에게 항복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고 썼다. "그대들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적들에게는 모든 것이 있다."

#같은날 서울 주식시장에서는 국내 은행들의 외채 만기 연장이 합의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종합주가지수가 무려 6.5%나 급등해 505.98로 마감했고, 원화 가치도 달러당 71원이나 오른 1600원을 기록했다. 한국의 외채 협상은 그해 설날이었던 1월 28일 타결됐는데, 만기 연장된 240억 달러의 외채 금리는 가산금리를 합쳐 7.91~8.41%에 달했다. 주가지수와 환율, 금리 모두 지금과 비교하면 끔찍한 수준이다.



아무튼 한국 정부는 예상보다 좋은 조건이라고 밝혔지만 외국 채권은행들은 이전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더 많은 이자 수입을 올릴 수 있게 됐다. 국제금융자본에게는 이렇듯 한 나라의 외환위기가 마음껏 잇속을 챙길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도 당하는 법. "포식은 포식하는 자를 해친다."

#2월 6일에는 일본 정부가 불경기(stagnant)에 접어들었다고 공식 선언했다. 경제기획청은 1975년 이후 처음으로 사용한 불경기란 단어가 경제 성장이 완전히 멈춰버렸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날 중의원에서는 30조 엔의 은행 구제계획을 승인했고, 일본 정부는 그 뒤로도 각종 경제 부양책을 쏟아냈지만 불경기 선언은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흐르는 맥주는 거품이 일지 않는다."

아시아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거침없었다. 2월 11일 발표된 미국의 1997년 성장률은 9년만의 최고치인 3.9%를 기록했고, 실업률은 24년만의 최저치인 4.9%, 물가상승률은 11년만의 최저치인 1.7%에 그쳤다. 뉴욕 주식시장의 다우지수는 이날 133포인트 올라 사상 최고치인 8314.55로 마감했다.


다우지수의 급등세와는 달리 아시아 각국 주식시장은 하락을 면치 못했는데, 인도네시아의 물가폭동이 반정부 시위로 발전했고, 무디스는 일본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연이어 강등했다. 한국에서는 2월 25일 새 대통령(김대중)이 취임했지만 국회 다수당(한나라당)이 총리 후보에 대한 인준을 거부했다. 경제위기의 안개는 여전히 짙게 깔려 있는 형국이었다. "한 번 흔들린 상상력은 하루아침에 가라앉지 않는다."

#나는 숨가쁘게 이어졌던 그 시절 금융시장 관련 기사들을 엮어 그해 말 책을 한 권 냈다. 지금은 절판된 '아시아 경제위기 1997~1998'이라는 제목의 책인데, 많은 사람들이 내용보다 각 장의 제목이 더 좋다고들 했다. 앞에서 각 문단의 말미에 인용한 문장들이 그것인데, 그 외에 이런 것도 있었다. "새는 걸어 다녀도 날개가 있음을 안다." "의혹은 얼굴에 생기는 주름과 같은 것."

하지만 아무도 그 출처는 알지 못했다. 나 역시 알려주지 않았다. 이제 와서야 밝히지만 이 문장들은 소설 '레미제라블'을 읽으며 밑줄 쳐둔 것들이다. 15년 전 그때는 정말 무정한 시기였다. 경제위기는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갔다. 그렇게 다 흘러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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