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칼럼]日 역사인식 전환, '덴노'를 주목한다

머니투데이 오영환 한국항공우주산업진흥협회 상근부회장 2012.11.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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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칼럼]日 역사인식 전환, '덴노'를 주목한다


2년 전, 필자가 주오사카총영사 시절의 일이다.
2010년은 일본이 나라(奈良)의 헤이조 경(平城京)에 천도한 지 1300년이 되는 해로 일본 각지에서 수많은 기념행사가 열렸다. 10월 8일에는 헤이조궁터에서 일본 국왕(일본식으로는 ‘덴노’,天皇)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들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기념식전이 열렸다. 일본의 각계 인사와 주재 외교단 등 약 2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기념식에서 일왕은 백제와 일본 간의 긴밀했던 관계에 대해 ‘종합판’이라 할 만한 주목되는 발언을 했다.

그는 헤이조궁이 있던 나라에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말을 꺼냈다. 이어 나라시대 칸무(桓武)왕의 모친이자 고닌(光仁)왕의 부인이었던 다카노노니이가사(高野新笠)왕후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쓰여져 있고, 나라시대 이전부터 일본에는 백제를 비롯한 대륙으로부터 도래인이 많이 이주해 와서 일본의 문화와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불교를 처음 전한 것도 백제였고, 논어도 백제인이 가져온 것이라고 말했다.



고대 백제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와 일본 간의 관계에 대해 과거 일왕이 단편적으로 언급한 적은 있었지만 이날처럼 내외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공식행사에서 ‘백제’를 네 번이나 지칭하면서 백제·일본 간의 긴밀했던 관계를 강조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필자는 기념식에 참석해서 연설을 들으면서 일왕이 백제에 대해 품고 있는 깊은 애정과 한·일 우호 관계를 바라는 진심어린 심경을 느낄 수 있었다.

2년 전 당시는 한·일 관계가 양국 국민간의 다양한 교류 확대로 상호인식과 친근감이 높아져서 비교적 양호한 관계에 있던 시기였다. 필자는 일왕의 발언이 양국 언론에 보도되고 국민들이 알게 되면 한·일 우호관계 발전에 더욱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바램은 다음날 아침 일본의 조간신문들을 보는 순간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전날의 기념식을 보도하면서 일왕의 백제 관련 언급 내용은 기사화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일본 언론사들은 보수우경화한 일본의 정치·사회 현실에서 일본의 상징이며 일본 역사와 자부심의 근원인 ‘덴노’가 한때 일본의 식민지로 업수이 여기던 조선의 고대 국가였던 백제를 칭송하고 백제로부터 받은 은의를 기리는 내용의 연설을 한 사실을 크게 보도하고 싶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고대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고 많은 한반도인들이 일본에 이주해왔다는 ‘덴노’의 발언 내용이 일본이 고대 삼한을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두어 경영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날조된 역사를 근거로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하려 했던 군국주의 시절 일본과 현재의 극우 정치세력의 입장과 다르기 때문에 이를 국민들이 알게 되는 것을 꺼렸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국 국왕이 진솔하게 인정한 역사적 사실은 적어도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본다. 더욱이 고대에 있어 한·일 양국이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한국이 20세기 전반의 시련을 극복하고 일본·중국과 더불어 세계 경제를 견인하는 아시아 성장의 주역으로 변모했다는 현실적인 인식에 서서 이웃국가를 보게 되면 친근감과 유대감이 조성되어 한·일 양국 국민이 지향하는 미래지향적인 우호 관계 구축에도 바람직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일본국민의 올바른 인식이 현재 일본이 아시아 이웃 국가들과 갈등과 마찰을 야기하고 있는 근본 원인인 일본 근대화시기에 대한 역사 인식과 과거사 청산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17세기 초 영국의 이주민들이 주축이 돼 건국한 미국은 미국 독립전쟁을 겪었지만 영국과 긴밀한 유대·협조 관계를 갖고 세계 평화와 번영을 위한 선도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유럽에서 오랜 기간 대립과 분쟁을 반복해 온 프랑스와 독일이 대립의 과거사를 접고 미래 유럽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쌍두마차로의 유럽연합(EU)을 견인하고 있는 사실은 한·일 양국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최근 일본의 보수 우경화가 향후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이웃 국가들과의 마찰, 분쟁을 증폭시켜 동아시아의 안위와 번영에도 위해를 초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경고가 언론과 많은 전문가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우려감에 일부 공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일본이 2차 세계 대전 이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평화 헌법을 지켜오면서 경제·기술 대국으로서 아시아와 세계 경제 발전에 기여해온 저력이 있는 국가라는 점에 기대를 걸고 싶다.

모쪼록 일본이 역사를 보는 시각의 전환을 통해 과거사에 기인하는 무거운 짐을 하루속히 내려놓고 국제사회에서 신뢰받는 보통국가로서 아시아 이웃국가과 함께 손잡고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의 길로 들어서기를 염원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본의 고대와 근대화 시기에 일본 역사의 정점에 서있던 ‘덴노’의 역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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