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결벽증이 있는 탓이라고 치부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좋은 글을 낳는 시발점이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글에 대한 작가의 진중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워드프로세서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문명의 이기로 요즘은 쉽게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머릿속에서 완벽히 생각을 정리하고 난 후에 써 내려가야 하는 원고지와는 달리 실수를 해도 쉽게 고칠 수 있는 컴퓨터 덕에 일단 써 놓고 보는 경우가 많다. 오타를 치거나 말의 앞뒤가 맞지 않으면 이내 지우기 버튼 하나로 실수를 지워버리면 그만이다. 이렇게 딜리트 버튼이 익숙해진 탓에 실생활 속에서도 이 기능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아주 작은 실수를 하거나 원치 않는 상황을 잠시나마 돌리고 싶을 때 나는 딜리트 버튼을 떠올리곤 한다.
실제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딜리트 버튼으로 지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타고난 것이든, 상황적인 것이든 말이다. 인생은 펜으로 쓴 원고지와 같아 한번 쓰여 지면 되돌리기 힘들다. 박범신 작가의 원고처럼 다시 쓴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이내 아버지 눈가에 늘어난 주름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주름이 인생을 대변한다 했던가. 이를 내보이시며 농담을 하시는 미소 뒤에 숨겨진 아버지의 선 굵은 주름에서 그의 삶의 무게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