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게도 마찬가지다. 필름 업계의 '제왕', '공룡', '역사'라는 수식어를 독식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최근 파산보호를 신청하는 지경으로 추락한 미국 기업 코닥(Kodak)이 불행하게도 후자에 속한다.
코닥의 몰락으로 평생 라이벌이었던 일본계 후지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코닥이 시대의 조류를 무시하고 안분지족한 생활에 젖어 있을 동안 후지는 디지털 시대에 대비해 만반의 전략을 펼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것이 같은 시대를 함께 해 온 동종업계의 희비가 엇갈리게 된 근본적 원인이었다. 코닥과 후지의 행보는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명확한 차이점을 보였다.
최초로 컬러필름과 휴대용 카메라를 선보이며 필름시장을 주도하던 코닥은 1975년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 기술을 개발했다. 그러나 정작 이를 상업화하는데 주저했다. 현재 잘나가고 있는 필름사업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1981년 코닥의 사내 보고서도 디지털 카메라의 위협에 대해 정확히 분석했지만 경영진은 묵살했다. "코닥은 현재에 안주하려는 전형적인 '일본기업'처럼 행동했고 후지가 오히려 유연한 '미국기업'처럼 보였다"는 말이 나올 법했다.
고모리 시게타카 후지필름 최고경영자(CEO)는 코닥 파산보호 신청 소식이 알려진 후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후지와 코닥 모두 디지털 시대가 도래 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것에 대비해 무엇을 했느냐에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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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에 대비할 수 있는 10여 년의 시간이 두 기업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지만 코닥은 지금 당장 잘나가고 있는 필름 사업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변화를 주저했고 후지는 미래를 정확하게 읽고 신속하게 이에 대비한 자구책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기술적으로 이미 다양한 자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새로운 것에 접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고모리 사장은 필름을 만드는 핵심기술을 제약, 화장품, 헬스케어 등에 접목시키는데 성공했다. 코닥처럼 '한 우물'만 파는 것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갔다. 야후나 노키아, 모토로라와 같은 업계의 선두주자가 하나같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이유도 변화에 움직이지 못한 게으름 때문이었다.
◇선택과 집중 그리고 실행=현상유지하기에 바빴던 코닥과 달리 디지털 시대에 도태되지 않고 살아 남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있던 후지의 선택과 집중, 실행속도는 돌이켜보면 코닥이 감히 흉내도 낼 수 없을 정도였다.
후지는 1970년 대 후반 미국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하며 코닥이 독점하다시피 한 필름시장을 슬금슬금 위협해 갔다. 코닥이 콧방귀를 뀌고 있을 동안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후원사로 선정된 후지는 값싼 필름으로 미국시장을 파고들었다. 가격경쟁에서 우위를 잡겠다는 계산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1990년대 들면서 코닥은 후지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2005년 이후 코닥은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매년 적자를 면치 못했다.
저무는 필름업계에 대한 판단이 선 뒤로부터 후지는 사업 다각화 전략에 주력했다. 필름을 만드는데 적용하는 나노기술을 화장품과 의료기술 등에 접목시켰다. 필름 부문의 이익이 감소하기 시작하자 회사는 헬스케어와 같은 부분에서 손실분을 충당할 수 있었다. 현재 헬스케어는 전체 매출의 12%를 차지한다. 지난달 후지는 미국 의료기기사 소노사이트사를 9억9500만 달러에 인수하는 등 관련 분야에 대한 투자도 활발히 하고 있다.
코닥도 투자를 게을리 한 것은 아니다. 오로지 필름 부문에 대한 투자에만 쏠려 다른 것은 도외시했다는 점이 문제다. 제약 분야에 대한 돈벌이가 괜찮을 것 같다는 말에 솔깃해 손을 댔지만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하지만 코닥이 이 분야에 대한 승산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기까지는 무려 6년의 시간이 걸렸다. 잘못된 선택과 집중이 부른 화다.
두 기업의 명운이 갈린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결국 전략을 총괄하는 리더의 능력 여부였다. 안토니오 페레즈 전 휴렛페커드 최고경영자(CEO)는 2005년 코닥으로 자리를 옮긴 후 잉크젯과 상업용 프린터기를 공급하는데 사활을 걸었지만 성공작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혁신가의 딜레마(The Innovator's Dilemma)' 공동저자인 그레저슨(Gregerson)은 코닥의 몰락은 하나의 기술에 의존하는 기업에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으로 그들은 주요수익원이 줄어드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디지털 카메라가 자신의 임기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경영진이 직시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고 분석했다.
'코닥의 순간(Kodak moment)'.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추억하고 싶은 순간'을 일컫는 고유명사처럼 불려온 단어다. 코닥에게 영예로움을 안겨줬던 이 말은 이제 역설적으로 후지와의 차이점을 드러내주는 말이 돼버린 듯하다. 코닥이 브랜드만 믿고 순간(moment)에 갇혀있을 동안 후지는 생존(survive)을 위해 오늘도 뛰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처럼 느껴지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