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정명훈이 들려준 2000억원의 감동

머니투데이 박종면 더벨대표 2011.12.26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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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시여/천국의 은총으로 채우소서/우리의 연약한 육신에/영원한 힘을 주소서/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으소서/우리에게 영원한 평화를 주소서/우리 길을 인도하시어/모든 위험을 비추게 하소서"

101년전인 1910년 9월12일 저녁 독일 뮌헨 국제박람회장에서 열린 말러 교향곡 8번 '천인교향곡'의 초연은 빠르고 격렬한 성령강림절 찬가 '창조주 성령이시여'로 시작됐다.



지휘자는 이곡의 작곡자인 깡마르고 창백한 사나이 구스타프 말러였다. 이날 공연에는 무려 3400명의 청중이 몰려왔고, 합창단 850명, 오케스트라 단원 146명에 8명의 성악가, 무대 뒤 11명의 금관연주자등 총 1015명이 나섰다.

말러는 스스로 말했듯이 이 엄청난 대곡을 누군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어 8주만에 완성했다. 천상의 말씀에 자신을 내던지고 만든 말러 인생의 요약이자 한 시대를 마감하는 의미를 갖는 이 곡의 초연이 끝나자 청중들은 무려 20분동안 열광적으로 박수치고 소리치고 발을 굴렀다. 말러는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그때 청중속의 어떤 젊은 예술가가 한 음악 비평가에게 얘기했다. "저분은 곧 돌아가실 겁니다. 저 눈을 보세요. 저건 승리를 향해 행진하는 개선장군의 표정이 아닙니다. 이미 어깨에 죽음의 무게를 느끼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에요."

젊은 예술가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천인교향곡 초연 후 8개월 뒤인 1911년 5월 18일 말러는 세상을 떠났다.

#"모든 뉘우치는 나약한 자들아/거룩하신 섭리에 따라/감사하며 변하라/모든 허무한 것들은/한낱 비유에 불과하니/미칠 수 없는 것이/여기서는 이루어지고/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여기서는 실현되네"


말러 자신의 초연 뒤 101년이 흐른 2011년 12월 22일 저녁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는 마에스트로 정명훈 지휘의 서울시향이 연주하는 말러 교향곡 8번 '천인교향곡'의 마지막 대목 '신비의 합창'이 웅장하고 장대하게 울려 퍼졌다.

말러 탄생 150년과 말러 서거 100년을 기념해 정명훈의 서울시향이 지난해 8월부터 시작한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 시리즈의 대장정을 끝내는 마지막 연주였다. 이날 공연에는 147명의 서울시향 연주자, 남녀혼성 합창단 240명, 어린이 합창단 80명, 그리고 8명의 독창자 등 총 475명이 참가했다.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 변신하게 된 게 말러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라고 까지 고백했던 정명훈은 말러 연주 시리즈의 마지막 곡으로 '말러가 세상에 보내는 작별인사'인 교향곡 9번이 아니라 ‘천상의 노래’ 8번을 선택했다.

초겨울 추위가 매서웠지만 합창석을 뺀 2000여석의 콘서트홀은 꽉 찼다. 중간 휴식시간 없이 90분간의 연주가 끝나자 청중들은 감동에 겨워 소리를 질렀고 기립박수를 보냈다. 마에스트로는 그 모든 박수와 격려를 합창단과 독창자, 시향 단원들에게 돌렸다. 청중들의 환호와 박수가 10여분간 계속되자 거장도 청중들처럼 지휘대에 걸터앉아 박수를 쳤다.

그때 누군가 속삭이는 듯 했다. "오늘 공연의 감동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아마 200억원은 될 거야. 아니 2000억원은 되는 것 같아. 근데 20억원이 왜 문제지:

대지진과 원전사고, 월가시위와 유럽의 위기, 반값 등록금 시위, 기성정치권의 몰락, 저축은행 영업정지와 서민들의 피눈물 같은 절망 속에서도 버티면서 2012년 새해를 기약하는 것은 말러와 정명훈 같은 거장의 위로 덕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늦은 겨울 밤 나는 서초동 예술의 전당 언덕을 걸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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