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10대뉴스]⑦'2500만불의 사나이' 빈라덴 사살

머니투데이 김성휘 기자 2011.12.1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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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엄친아서 테러리스트로

지난 5월 1일 자정 파키스탄 아보타바드 교외의 한 고급 주택. 검은 특수 복장의 군인들이 소리 없이 집안으로 진입, 거침없이 가옥을 장악했다. 집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은 거칠게 저항했지만 끝내 새벽 1시경 사살됐다.

이 소식은 날이 밝자 전세계를 뒤흔들었다. 이날 작전에 나선 쪽은 미 특수부대 네이비실과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이었고 죽은 사람은 9.11 테러의 배후이자 전세계 테러리즘의 대명사가 된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 라덴(사진)이었기 때문이다.



[국제 10대뉴스]⑦'2500만불의 사나이' 빈라덴 사살


이번 작전을 직접 지시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2일 빈 라덴 사살을 공식 선언했다. 미국은 보복테러 또는 빈라덴 무덤의 이슬람 성지화가 우려된다며 그의 시신을 공개하거나 매장하지 않고 곧장 바다에 수장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심장부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고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지 10년만에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현상금 2500만달러 사나이= 빈 라덴은 1957년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의 명문가 빈 라덴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인 10명으로부터 53명의 자식을 낳은 부자 아버지에게서 그가 물려받은 유산만 우리 돈으로 약 3300억원.

그는 부유층 자제로 학창시절을 레바논에서 보냈지만 1979년 구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그의 인생을 바꾼다. 그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무장 투쟁에 심취했고 알카에다를 창설한다.

빈 라덴을 세계적 테러리스트로 만든 것은 공교롭게 미국. 미국이 빈 라덴을 공개적으로 쫓기 시작한 건 9.11테러가 나기 전인 1997년이다.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죽이든 살리든 그를 잡으라고 명령했다.


1998년 8월엔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미국 대사관에서 차량폭탄 테러가 발생하고 미국은 그 배후로 빈 라덴을 지목했다. 당시 미국은 미사일 수십 발을 빈 라덴 근거지에 퍼부었으나 빈 라덴은 보란 듯이 살아났고 이후 그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구심점이자 영웅으로 부상했다. 9.11 테러 이후 그의 목에 걸린 현상금은 2500만달러로 늘었다.

국고 탕진, 미국 파산 노렸다?= 2001년 9.11 테러로 미국의 빈 라덴 추적은 전세계가 주목하는 국제 이슈가 됐고 마침내 14년여만에 미국은 '미션 클리어'를 외쳤다. 하지만 미국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진군해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고 이라크를 공격,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다. 이는 미국이 상정한 테러리스트 또는 테러 지원 정권을 축출하는 효과는 거뒀지만 미국은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엄청난 국고를 군비에 쏟아부었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하던 미국 경제의 결정적 위기를 초래한 이유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미국 경제의 기반을 갉아먹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 10년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전, 군비 확충, 정보 분야와 안보 관련 지출로 2조달러 넘게 썼다. 지난 5월 당시 미국의 공공부채 9조6800억달러의 20% 넘는 규모다.

일부에선 이른바 '빈라덴 코스트(비용)'를 더 늘려 잡는다. 무디스 애널리틱스의 마크 잔디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빈라덴이 미국 정부와 산업계에 총 2조5000억달러, 1년에 2500억달러의 비용부담을 지웠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빈라덴이 이 같은 상황을 의도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 지난 15일 미군은 이라크 임무의 종료를 공식 선언했다. 이라크의 치안불안 등 미군이 완전히 발을 빼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미 연방정부의 부채가 한도를 채울 만큼 나라 경영이 어려워진 마당에 더이상 밑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군비를 지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미국이 빈라덴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해보인다. 물론 9.11테러로 가족과 친지를 잃은 유가족들의 아픔도 쉽사리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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