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사랑이 온다'···불편한 진실 털어놓다

머니투데이 이언주 기자 2011.11.09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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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우리사회 뿌리깊은 가부장적 폭력, 그 끝은?

↑ 학대 받은 어린시절에 대한 복수를 위해 아버지를 찾은 아들. ⓒ극단 전망↑ 학대 받은 어린시절에 대한 복수를 위해 아버지를 찾은 아들. ⓒ극단 전망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하다. 객석은 훌쩍였고 수시로 작게 한숨을 쉬며 숨 고르는 소리도 들렸다. 불편한 진실 앞에 눈과 귀를 꼼짝없이 열어둔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 관객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연극 '사랑이 온다'(작 배봉기, 연출 심재찬)는 가출한 아들이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15년만에 집을 찾아오는 날로 시작된다.



"지팡이! 야, 이것아! 두더지만도 못한 것! 야, 이 병신아! 에이, 저런 굼벵이 같은 것!"

캄캄한 창고를 더듬으며 남편의 지팡이를 찾고 있는 아내에게 남편의 욕설이 이어진다. 아내는 겨우 찾은 지팡이를 직접 건네지 못하고 맞을까 두려워 남편에게서 조금 떨어진 마루에 걸쳐놓는다. 이 부부의 삶, 가족의 삶이 어땠을지 한순간에 그려진다.



아버지의 학대를 버티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간 아들은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빚을 '정산'하기 위해 집에 돌아온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가득 한 아들이 앙갚음을 위해 아버지와 마주한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사회는 어쩌면 공정한 사회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주고받는 것을 '폭력'이라는 사회적 악과 결부시켰다. 폭력은 또 다시 폭력을 낳는다고 했듯 아들은 폭력적인 아버지를 죽일 듯이 미워하면서도 결혼할 여자와 주변인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끝나지 않는 가정폭력, 나아가 사회폭력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내 속에 이 악마 같은 짐승새끼를 죽이기 전에는 나 사람새끼로 살 수 없어요. 나도 정말 사람새끼로 살고 싶다고요!"


아들은 오열하듯 소리치며 아버지 때문에 자신 속에 자라게 된 짐승을 죽이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정산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두번째 여자를 데리고 또 다시 집을 찾았을 때도 그 정산은 차마 이루지 못한다.

↑ 자신이 가한 폭력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여자를 지켜보는 것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순화되는 남자. 더이상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않고 다른 돌파구를 찾았다. ⓒ극단 전망↑ 자신이 가한 폭력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여자를 지켜보는 것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순화되는 남자. 더이상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않고 다른 돌파구를 찾았다. ⓒ극단 전망
세 번째 여자와 다시 온 아들은 순화된 모습이다. 폭력으로의 앙갚음이 아닌 다른 방법을 택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자신이 가한 폭력의 상처로 죽을 만큼 괴로워하며 발작을 일으키는 여자를 지켜보는 것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폭력적 욕구는 남아있지만 그 욕구를 진정시킬 출구를 찾은 것이다.

아들 뿐 아니라 부부의 모습도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 다리를 절던 남편은 휠체어에 의지한 채 말도 제대로 못하고, 첫 장면에서 남편의 눈치를 보던 아내는 어디가고 잔소리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남편의 뺨을 스스럼없이 툭 때릴 때 관객들은 속이 시원할 법도 한데 씁쓸한 웃음이 날 뿐이다.

어머니는 결국 아들이 못다한 '정산'을 대신 실행한다. 극의 마지막에서 검은 비닐봉투로 남편을 살인하고 자신도 나란히 앉아 자살함으로써 폭력성에 대한 깊은 뿌리를 뽑는다. 죽음을 눈앞에 둔 남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아-랑-해-요"를 반복한다. 우리사회 깊이 스며든 가부장성, 폭력성의 정화에 과연 어떤 고통과 인내, 사랑이 필요할까 생각하게 한다.

지난해 초연 당시 이미 절정의 연기로 극찬 받았던 배우 박경근(남편), 길해연(아내), 김수현(아들), 이소영(여자1), 황정민(여자2), 이태린(여자3)이 다시 모여 숨 막힐 듯 밀도 있는 연기로 생생한 무대를 선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우리네 진실을 눈물겹게도 솔직하게 그려냈다.

공연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13일까지. 티켓은 1만5000원, 1만원(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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