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선택적 기억'의 함정

머니투데이 정희경 부국장겸 산업부장 2010.10.27 08:38
글자크기
[광화문] '선택적 기억'의 함정


가을을 채 타 보기도 전에 한파가 찾아왔다. 서울과 중부 내륙지방에서 얼음과 서리가 관측되는 등 초겨울 분위기다. 기온마저 영하로 내려가면 연말이 더 가까이 와닿을 듯하다. 주변에선 "벌써 한 해가 지나가나"라며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왜 시간은 점점 빨리 흐를까. 나이가 들수록 그렇다고 하는데,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다우베 드라이스마 교수는 '망원경효과'나 '회상효과' 등으로 이 현상을 풀이했다.



우선 과거 사실을 떠올릴 때 마치 망원경을 통해 보는 것처럼 확대되면서 시간적 거리가 축소된다고 한다. 과거 사건이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만큼 최근 시간흐름은 짧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회상효과'는 대개 사람들이 기억 속의 사건을 끄집어낼 때 자신만의 표식을 사용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젊은 시절은 기억할 만한 표식이 많아 길게 다가오지만 중년 이후에는 그 표식이 줄어들면서 기억에 빈 틈이 생기고, 시간도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여겨진다.



기억의 예측불가성, 일종의 '변심'은 시간흐름뿐 아니라 현재 사건을 달리 보게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선택적 기억'이다. 이는 의식에 강하게 각인된 기억만 남기고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은 보거나 들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현상을 지칭한다. 긍정적인 장면만 기억하고 나쁜 일은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면 좋으련만, 반대로 부정적인 영상만 축적하는 이가 제법 있다.

사람들이 대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스스로 확인한 만큼 신뢰의 정도가 강해 웬만한 반론에 꿈쩍도 하지 않거나 아예 이를 무시해 버린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릇된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좀처럼 받아들이질 못한다. 이런 분위기가 확산되면 한 조직을 넘어 자칫 사회 전반의 활력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

'선택적 기억'은 확대 재생산될 여지도 있다. 한번 왜곡된 렌즈로 현실을 판단한 후에는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 '부분적' 사실에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상관관계를 인식하는 '착각상관' 현상까지 더해지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최근 검찰의 기업 비자금 수사가 확대될 조짐이 보이면서 '선택적 기억'에 대한 우려가 떠올랐다. 기업들은 으레 비자금을 조성한 뒤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거나 다른 기업을 인수할 때 로비자금으로 활용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다. 이달 들어 수사선상에 오른 기업들이 받는 혐의에서 비자금 조성과 정·관계 로비가 빠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기업에 동일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온당치 않다.

기업들에선 당국이나 주주의 감시망이 촘촘해지면서 비자금 조성이 여의치 않아졌고 설사 금품로비를 하더라도 바라는 결과를 얻기 어렵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기업 회계의 투명성이 과거에 비하면 크게 개선됐다는 평가도 있다. 당국이 위법이나 탈법행위를 바로잡는 것은 기업 전반의 건전성 확보에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기업=비자금 조성'이란 등식을 유도하는 식의 접근은 피해야 한다고 본다.

이번에 다시 등장한 '기업 사정' 등의 표현 역시 달갑지 않다. 시간을 빨리 흐르게 만드는 '망원경효과'나 '회상효과'가 작용하는 경우 기업들의 행태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어서다. 최근 시간을 길게 늘이려면 새로운 표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정부나 기업들이 외환위기 이후 체질개선에 들인 노력을 기억에 새기는 방법은 없을까.

이 기사의 관련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