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밤 뒤셀도르프에 도착하니 고 백남준 선생의 회고전과 어워드가 궁전미술관에서 열린다는 포스터가 공항 주변과 도시 곳곳에 덮여 있었습니다. 뒤셀도르프는 1500만 인구가 밀집한 라인베스트팔렌 지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도시인데 여기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백남준 선생님이 비디오아트 교수를 20년 이상 맡았다고 합니다. 영국 테이트리버풀에서도 회고전이 열리고요. 방황하던 무명의 예술가를 품어준 뒤셀도르프가 이제는 거꾸로 백남준으로 유명한 예술의 도시가 됐습니다. '컬처파워'입니다.
"어제의 문화가 오늘의 기술이 되고 오늘의 기술이 내일엔 문화가 된다"고 했습니다. 전기는 어둠의 문화를 바꿨고 신자유주의를 비판한 옥스퍼드 장하준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세탁기가 여성들의 삶과 문화를 바꾼 변화는 최근의 인터넷 혁명보다 더 컸던 혁명이었다고 짚기도 했는데 이들이 '테크파워'가 '컬처파워'를 견인한 사례라면 거꾸로 중세유럽을 지배한 가톨릭 문화와 근대를 연 프로테스탄트문화는 '컬처파워'가 '테크파워'를 견인한 사례들입니다. 신이 설계한 우주와 세계의 비밀을 연구하고 그것을 인간화하는 것을 용인한 18세기 이후 프로테스탄트문화에서 인간의 기술적 상상력은 무한대로 성장했잖습니까.
지금도 우리는 '컬처파워'를 무시하고 '테크파워'의 꿈에만 올인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광고계 크리에이터들이 만들어내는 숱한 아이디어도 클라이언트 기업문화와 코드가 맞지 않으면 서랍에서 영면합니다. 아이디어 때문이 아니라 두 기업의 문화력(力) 차이 때문입니다. 특허청의 수십만 발명 특허는 인간의 욕망에 맞게 발명하거나 재해석하는 '컬처파워'의 부족으로 잠자고 있습니다. LG전자가 다언어 문화권인 아프리카나 종교적 색채가 강한 이스라엘·아랍권 문화에 맞게 개발한 현지형 가전제품들은 이 '테크파워'와 '컬처파워'를 융합해 시장수요로 발전시킨 좋은 예들입니다. '테크파워'만이 돈을 벌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일정수준이 넘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컬처파워'가 돈을 벌어줍니다. 예술가 무라카미 다카시가 루이비통에 벌어준 가치가 얼맙니까. 그래서 일류 반열의 기업들은 '컬처파워=문화력(力)'을 키우는데 주력하는 모양입니다. 겉도는 장식용 문화(Culture Garbage)가 아닌 욕구에 딱 붙는 문화(Culture Power)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한국의 '컬처파워'는 G20 의장국에 걸맞은 수준일까요. 참고로 우리나라는 세계 문화콘텐츠 시장의 2%랍니다. 무역규모는 12위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