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따라 하기

머니투데이 김영권 머니위크 편집국장 2010.07.01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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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에세이]맑고 향기로운 씨앗을 마음속에 심자

지난 3월11일 입적하신 법정 스님의 속뜰을 어찌 다 헤아릴까. 그러나 스님의 글과 법문을 읽다보면 몇가지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우선, 스님의 젊은 시절. 스님이 1972년 <영혼의 모음>에 이어 두번째 산문집인 <무소유>를 냈을 때가 1976년이다. 그때 세속 나이가 마흔넷이니 나보다 젊으셨다. <무소유>에는 평생 글을 써서 공양해야 할 스님의 문학적 재능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학승과 선승의 모습도 교차한다. 그리고 드문드문 스님의 젊은 혈기와 관념적 냄새도 풍긴다. 1970년대 유신 독재와 부조리를 개탄하는 분심도 배어 있다. 30,40대 스님의 거친 생각이 엿보일 때 나는 은근히 경쟁심이 발동해 씨익 웃는다. 그래, 스님도 왕년에 젊으셨지! 아주 어린 풋중일 때도 있었지!



두번째, 스님의 산골 생활. 스님은 깊은 산속 오두막에서 홀로 사셨다. 신새벽에 깨어 예불을 드리고, 찻물을 다리고, 아침을 챙겼다. 산책을 하고, 채마밭을 갈고, 책을 읽었다.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에 바흐를 넣고 선율을 음미했다. 꽁꽁 언 개울을 깨서 물을 길렀다. 땔깜을 모아 장작을 패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글을 쓰고, 편지를 읽었다. 가을 햇살을 맞으며 문풍지를 발랐다. 댓잎 스치는 소슬 바람 소리를 듣고, 안뜰에 내린 교교한 달빛을 바라 보았다.

스님이 17년간 거한 송광사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오두막으로 갔을 때가 나이 예순이었다. 스님은 입적하실 때까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서 '텅빈 충만'을 즐겼다. 당신이 계신 곳이 알려지면 또 다른 곳으로 뜨겠다고 하는 바람에 누구도 거처를 밝히지 못했다. 그 뜻을 헤아려 나도 스님이 어디에 계신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곳이 오대산 자락인 것을 나는 입적하신 다음에야 알았다.



세번째, 법문하러 산을 내려오는 모습. 스님은 한두달에 한번 꼴로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오셨다. 그게 짝수달 정기법회와 부처님 오신날, 하안거와 동안거 결제·해제일, 길상사 창건일 정도다. 스님은 새벽같이 산을 내려와 법문하고, 그날 바로 산으로 가셨다. 길상사를 세웠지만 그곳에 자신의 방 하나 두지 않았다. 사실 스님은 법문하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치도 소홀하지 않았다. '중된 도리'를 다해야 했기 때문이다.

스님의 법문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 거침없이 나아갔다. 지루할 틈이 없었다. 조금 긴장하고 들어야 했다. 물 흐르듯 흐르지만 곳곳에 따가운 쓴소리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한마디 한마디가 깊이 생각하고 다듬고 묵힌 것이리라. 스님은 번다함이 없는 곳에서 자신을 깨우고 법문을 채워서 한두달에 한번씩 내어 놓았다. 침묵 속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소중하게 갈고 닦은 보석을 풀어 놓았다. 나는 스님이 다음 법문을 생각하며 매일매일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심정이 느껴진다.

넷째, 맑고 향기로운 눈매. 스님은 맑고 향기로운 기운을 몸에 담기 위해 청정한 생활규범을 지켰다. 마지막에는 가장 아끼던 벗인 책과 다기에 대한 소소한 욕심도 내려 놓았다. '무소유'는 스님의 평생 화두였다. 그것은 몸과 마음과 머리에서 모두 실천해야 할 총체적인 것이었다.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평생 수행과 함께 스님의 글은 후작으로 갈수록 더 맑고 깊어졌다. 더 쉽고 유연해졌다. 더 간결하고 분명해졌다. 더 깊숙하게 영혼을 울렸다. 그래서 나는 스님이 시공을 달리한 것이 더욱 안타깝다. 조금 더 이생에 계셨더라면 우리는 더 크게 울리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스님을 생전에 뵌 적이 없다. 그러나 그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이제 스님이 퍼트린 맑고 향기로운 씨앗을 내 마음 속에 심는다. 스님이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어떻게 가꾸고 꽃피웠는지, 그 모습을 하나둘씩 떠올려 본다.

  ☞웰빙노트

마음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맑은 마음'과 '물든 마음'이 그것입니다. 맑은 마음은 우리 본래의 마음이고, 물든 마음은 번뇌로 가려진 마음, 분별로 얼룩진 마음입니다. 그래서 진리와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밖으로는 복잡한 얽힘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을 비우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나 정작 얼굴의 실체인 자기 내면의 얼굴은 들여다볼 줄 모릅니다. 거울에 나타나는 것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거죽의 얼굴을 보지 말고 자기 내면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내 인생을 순간순간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가? 나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소모하고 있는가? 오늘 만난 이웃을 내가 어떻게 대했는가? 늘 되살펴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새롭습니다. 그것이 낡고 똑같은 반복처럼 보이는 까닭은 우리 마음속에 과거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관념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과거를 통해서 관념의 눈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뿐입니다. 진정한 삶은 순간마다 새롭습니다. 순간마다 새로운 이 삶은 신비로 가득합니다. 이 신비가 우리를 본래의 나로 인도합니다. 살아 있는 것은 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강과 산은 본래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 느끼면서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바로 강과 산의 주인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변에는 관심을 안으로 기울이면 우리들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대상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런데 눈을 밖으로만 팔기 때문에, 외부적인 상황이나 그 덫에 걸려서 나의 삶과 연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선택입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은 행복하게 살 줄 알아야 합니다.
<법정스님 법문집(일기일회,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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