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테스] 볼커룰과 금융의 역할

신보성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 2010.02.16 10:10
글자크기
[폰테스] 볼커룰과 금융의 역할


1980년대 중반 미국 자본시장은 대세상승국면에 진입한다. 자본시장이 성장하자 기업은 은행대출 대신 회사채와 주식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예금자들 또한 하나둘 은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위기를 직감한 은행들은 증권업무를 취급하기 위해 입법활동을 치열하게 전개한다. 1933년 제정된 글래스스티걸법이라는 족쇄로 은행이 증권업무를 영위할 수 없음은 물론 증권사를 계열사로 두는 것도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시 FRB 의장이던 폴 볼커는 금융시스템의 중요한 보루인 은행이 증권업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는 것을 마뜩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글래스스티걸법 폐지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7년 앨런 그린스펀이 볼커의 뒤를 이어 FRB 의장이 되면서 가속화된다. 실제로 그린스펀이 취임한 이후 FRB는 은행들이 계열사를 활용해 증권업무 취급비중을 확대해나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 제정된 금융현대화법을 계기로 은행들은 계열증권사를 통해 증권업무를 마음껏 영위할 수 있게 된다.



그로부터 꼭 10년이 흐른 지금 볼커룰에 의해 은행업과 증권업 겸업제한 논의가 다시금 불거졌다. 하지만 이번에 볼커가 제안한 내용은 글래스스티걸법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무엇보다 글래스스티걸법과 달리 볼커룰에서는 은행과 증권사의 계열관계를 허용한다. 대신 은행계열 증권사의 업무를 유가증권 인수, 위탁매매, 인수돚합병(M&A)과 같은 고객을 상대로 하는 전통적인 증권업무로 한정했다. 이에 따라 위험이 큰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소유 및 투자가 금지되고 대고객업무와 무관한 고유자산 트레이딩도 허용되지 않는다.

볼커룰의 요지는 은행이 포함된 금융그룹이 본연의 중개기능과 거리가 먼 고위험 증권업무를 수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볼커는 또한 공정경쟁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은행이 포함된 대형 금융그룹은 정부의 구제조치로 파산 가능성이 낮고, 따라서 자금조달 비용도 적다. 그런데 이러한 조달비용상 우위를 활용해 헤지펀드, 사모펀드, 고유자산 트레이딩 등의 업무를 영위한다면 이들 업무에 특화한 비은행계열 금융기관들은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볼커룰은 상당부분 타당한 주장을 담고 있다. 그러나 해결할 문제 또한 산적하다. 우선 기술적인 문제다. 트레이딩자산 중 어디까지가 대고객업무를 위한 것인지를 외부자인 감독당국이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트레이딩업무 규제에 대해 원칙적인 합의를 끌어낸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실행은 결코 녹록지 않을 것이다.

유럽국가들의 반대도 상당할 전망이다. 사실 은행업과 고위험 증권업의 결합에 따른 문제는 유럽에서 훨씬 심각하다. 은행업과 증권업을 사내겸영하는 유럽 대형 금융그룹의 경우 전체 자산에서 트레이딩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의 3배를 넘는다. 이러한 상태에서 고유자산 트레이딩을 비롯한 고위험 증권업무를 중단하려는 움직임에 순순히 응할 리 만무한 것이다.

과거 FRB 의장 시절 뚝심있는 고금리정책으로 인플레를 잠재운 볼커가 금융시스템 개혁에서도 필적할 만한 성과를 거둘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일관되고도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금융의 중개기능 회복이다. 고객, 즉 자금 수요자와 공급자의 간극을 메우는 금융 본연의 기능과 무관한 그들만의 잔치에 납세자들이 뒷배를 봐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이번 금융위기는 전대미문의 금융과잉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금융과잉은 금융부족만큼이나 독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생생히 보았다. 금융과잉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지금 우리는 다가올 시대의 금융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일부 허점에도 불구하고 볼커룰을 허투루 대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