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주권' 세우고 떠난 마지막 개성상인

머니투데이 김명룡 기자 2009.11.1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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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섭 녹십자 회장 영결식 엄수

백신의 자급자족이라는 ‘백신안보’ 일궈낸 바이오산업계의 큰 별이 졌다.

18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녹십자 목암빌딩에서는 고 허영섭(許永燮) 회장에 대한 영결식이 엄수됐다. 고인은 자신이 땀 흘려 터를 닦은 녹십자 본사에서 직원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영면의 길에 들어섰다. 고인은 지난 15일 오후 10시 30분 숙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69세.

故 허영섭 녹십자 회장은 '송방(松房)' 또는 '송상(松商)'이라 불리는 1세대 개성상인이다. 한일시멘트 창업주인 故 허채경 회장의 차남인 고인은 경기도 개풍 출신이다.



◇ 꼼꼼함 검소함..개성상인의 전형= 고인은 개성 출신 기업인들의 가장 큰 특징인 탄탄한 재무구조와 내실을 중시하는 경영방침을 고집스럽게 지켰다. 이를 바탕으로 녹십자 (113,900원 ▼3,700 -3.15%)를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분야 등에서 연 매출 6000억원대를 올리는 국제적인 생명공학 전문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백신주권' 세우고 떠난 마지막 개성상인


1세대 개성상인들이 그렇듯 고인도 '개성상인' 특유의 꼼꼼함과 검소함을 실천했다. 고 허 회장은 매월 발간되는 녹십자 사내보의 원고를 직접 교정을 볼 정도로 대부분의 회사 업무를 아직까지 꼼꼼히 챙겼다. 1970년 녹십자 공무부장으로 일할 당시에는 보일러 점검을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 12시가 넘어서까지 순찰을 돌았다.



B형간염백신 '헤파박스'가 대히트를 친 1984년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 54만3000주를 전직원에게 무상배분했을 정도로 주변에겐 후했다.

학창시절 공학도로써 과학자를 꿈꾸던 고인은 독일 유학시절, 선진국과 비교해 척박한 국내의 보건 환경을 안타까움을 느끼고 1970년 귀국했다. 이후 평생을 국내 필수의약품 분야를 개척해 수입에 의존하던 값비싼 의약품을 국산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발한 B형 간염백신, 세계 최초로 개발한 유행성출혈열 백신 등은 불모지나 다름 없던 국내 바이오 의약품 분야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먼지가 쌓여도 이 땅에 쌓인다”= 고인은 ‘만들기 힘든, 그러나 꼭 있어야 할 특수의약품 개발’에 매진하여 국산화를 이룩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최근의 신종플루 백신의 개발과 공급은 국내는 물론 전세계적인 대유행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백신자주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 각별하다.

지난 2004년 백신 사업자를 선정할 당시 외국 자본과 합자형태를 추진할 수도 있었지만, 당시 허회장은 "외국 자본과 함께 시작하면 쉽고 이득도 많이 남겠지만 대한민국 백신주권은 수호하지 못한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고인은 “먼지가 쌓여도 이 땅에 쌓인다”며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다른 기업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는 민간 연구재단인 ‘목암생명공학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환경이 좋은 외국에 연구소를 설립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업에 투자를 할 수도 있었지만, 사회에 환원해 국내 생명공학 연구기반 조성하는 길을 택했다.

재계와 업계관계자들은 고인에 대해 “경제적인 득실보다는 국가와 사회를 먼저 생각하는 가치관이 강했던 분”이라며 “자신에게는 엄격하리만큼 검소했지만 공익을 위한 일에는 그 누구보다 아낌이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  지난 2004년 백신 사업자를 선정할 당시 외국 자본과 합자형태를 추진할 수도 있었지만, 당시 허회장은 "외국 자본과 함께 시작하면 쉽고 이득도 많이 남겠지만 대한민국 백신주권은 수호하지 못한다"며 거절했다.↑ 지난 2004년 백신 사업자를 선정할 당시 외국 자본과 합자형태를 추진할 수도 있었지만, 당시 허회장은 "외국 자본과 함께 시작하면 쉽고 이득도 많이 남겠지만 대한민국 백신주권은 수호하지 못한다"며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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