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 시프트]위기와 '패러다임 시프트'

황상연 경기개발연구원 책임연구원(경제학박사) 2009.09.2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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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 시프트]위기와 '패러다임 시프트'


현재의 경제위기는 세계경제질서의 재편이라는 미래지향적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유시장경제의 대안을 촉구하는 능동적 움직임을 비롯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는 화두들을 살펴보면 '패러다임 시프트'급의 새로운 경제질서에 대한 요구가 시대적 흐름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위기가 던져준 새로운 경제 질서의 화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구분된다. △ 미국식 자본주의의 몰락 △ 금융 규제 강화 움직임 △ 정부 역할 확대 논란(시장vs정부) △ 주요 20개국(G20)으로 대변되는 유례없는 공조 움직임 등이다.



위기가 불러온 첫번째 화두는 그동안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던 미국 투자은행(미국식 자본주의)의 쇠퇴이다. 위기 확산 과정에서 금융위기 현실화를 예측한 전문가들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그동안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에 대해 갖고 있던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적극적 레버리지를 이용한 고부가가치 창출이라는 미국 투자은행의 전설은 당분간 잊어버려야 할 환상일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 화두는 금융규제 강화 움직임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최근 리먼 파산 1주년 연설에서 금융시스템의 강도 높은 개혁을 선언했다. 이는 위기 발생의 본질이 월가 탐욕에서 비롯됐으며, 금융개혁 없이는 새로운 경제질서는 물론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권의 도덕적 해이로만 설명하는 것은 본질을 절반만 이해하는 것이다. 정부 역시 잘못된 주택 및 금융정책을 통해 시장에 잘못 개입한 주범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제 질서 창출을 위해서는 정부 실패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세 번째 화두는 경제학의 오랜 논쟁거리인 '시장 대 정부' 역할 논란이다. 이번 위기를 '시장 실패'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앞으로 시장보다 정부 역할 강화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러한 논란이 야기되는 것은 상당부분 시장 중심 자본시장을 이끌던 미국의 추락된 위상에 기인한다.


하지만 미국 경제에 대한 환상을 던져버리는 것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법으로 보기 어렵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기저에는 시장 실패보다는 정부실패의 요인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과 정부 역할의 적절한 조화가 중요한 이유이다.

네 번째 화두는 주요 20개국(G20)으로 대표되는 유례없는 재정 및 통화정책 공조 움직임이다. G20의 통화스왑 확대, 금리인하 등 다양한 정책공조는 글로벌 금융시장 안정화와 실물경제의 자유낙하 방지에 주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정책공조 체제가 선진 7개국(G7)에서 중국을 필두로 한 신흥국가들로 확대됐다는 점은 세계경제질서의 중심이동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세계의 공장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가들이 소비시장의 미국의 공백을 채우기엔 역부족이다.

세계경제질서의 중심이동에 대한 논의가 현실 경제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신흥국가들의 실물 경제성장, 역내 자유무역 추진 의지,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등 역내 공조 체제의 강화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현 경제위기는 기존의 세계경제질서 및 경제작동원리의 재평가와 이를 통한 대안 찾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위기의 전개과정에서 연출된 다양한 현상에 대한 분석과 진단이 선행되지 않고 섣불리 선택된 새로운 경제 질서는 막대한 경제·사회적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 '패러다임 전환'에 앞서 과거를 되돌아 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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