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그먼, 위기1년 진단]경제학자의 실패(2)

머니투데이 권다희 기자 2009.09.09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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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에서 케인즈로, 그리고 다시 스미스로◇

경제학이 비상사태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된 원인에 대해 크루그먼은 경제학이 '합리적 경제주체'와 '완벽한 시장'이라는 전제를 지나치게 신봉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 가정은 아담 스미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 경제학의 태동은 스미스의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이 쓰인 1776년부터라 할 수 있다. 이후 160년 간 경제학은 '시장을 신뢰하라'라는 중심 메시지에 맞춰 여러 갈래로 발전해 왔다.



물론 경제학자들은 시장실패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시인했다. 공해나 교통체증처럼 경제주체들이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채 의도치 않게 발생시키는 '외부효과'가 시장실패의 대표적 예다. 그러나 대공황 이전의 '신고전학파'(neoclassical) 경제학자들은 시장 시스템에 대한 신념을 굳건히 지켰다.

그러던 그들의 신념이 대공황으로 인해 한차례 분기점을 맞았다.



1936년 출간된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케인즈는 자유 시장 경제가 관리자 없이 기능할 수 있다는 기존의 개념에 도전했다. 그는 경기침체기 동안 화폐 발행을 늘리고, 실업을 줄이기 위해 공공지출을 늘리는 등의 적극적인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대공황의 발생과 해결책에 대해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내린 처방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반세기 간 경제학이 걸어온 길을 넓은 관점에서 보면 '케인즈주의의 후퇴'와 '신고전주의의 도래'로 표현할 수 있다고 크루그먼은 표현한다.

신고전주의의 부흥은 밀턴 프리드먼에 의해 시작됐다. 시카고 대학 교수 프리드먼은 1953년 발간한 논문에서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경제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묘사하는 데 강력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통화주의 이론은 1970년대 석유파동을 계기로 경제학계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케인즈 경제학이 과도한 인플레이션에 의한 세계경제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고 평가되며 통화주의 이론이 대안으로 부상한 것이다. 프리드먼은 (케인즈 식의)과도한 확장 정책이 인플레이션과 높은 실업을 동시에 유발시킨 원인이라고 보았다.


일명 '통화주의자'들로 일컬어지는 프리드먼과 그의 지지자들은 시장경제에 정부가 개입하는 계획적인 안정화 정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매우 제한적인 정부 개입을 제안했다. 정부의 경제 개입은 중앙은행의 통화량 공급 조절로 한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통화주의자들은 통화량 조절이 공황을 막을 수 있는 충분조건이라고 생각했다. 프리드먼과 또 다른 통화주의자 안나 슈워츠는 대공황이 발발한 이유에 대해 FRB가 통화량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FRB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했다면 대공황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프리드먼은 후에 정부가 아무리 조절을 한다 할지라도 '자연실업률'(미국의 경우 4.8%)이하로는 실업률을 낮출 수 없다는 이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정부의 경기부양책은 단기적으로는 산출량을 증가시켜 현실의 실업률을 자연실업률 수준 밑으로 낮출 수 있겠지만, 이 과정에서 나타난 물가상승으로 인해 사람들이 앞으로 발생할 인플레이션에 대해 합리적인 기대를 형성해 장기적으로는 다시 자연실업률로 복귀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反)케인지언 흐름은 프리드먼 이후 더욱 심해졌다. 많은 거시경제학자들이 경기 침체를 이해하는 케인즈의 프레임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슘페터로 회귀했고, 다른 이들은 대공황을 경제의 조정과정 중에 발생하는 '좋은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경기침체와 맞서려는 어떠한 시도도 해로운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거시경제학자들이 이러한 길을 따랐던 것은 아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자신을 정부의 적극적 역할에 대한 믿음을 유지한 '뉴 케인지언'으로 자처했다. 그러나 그들도 투자자와 소비자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며 시장이 일반적으로 제대로 작동한다는 가정은 수용했다.

물론 이러한 트렌드에서 예외인 이들도 있다. 몇몇 경제학자들은 금융 시장이 신뢰할만하다는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며 '합리적 행동'가정에 도전해왔지만 수적으로 너무나 소수였다.

◇ 합리적 금융시장의 신화 ◇



금융이론 역시 오랜 동안 ‘합리성의 신화’ 아래 놓여있었다. 2005년 FRB 컨퍼런스의 분위기는 이러한 신화가 얼마나 굳건했는지를 전해준다. 당시 컨퍼런스에서 시카고대의 라구람 라잔이 한 논문을 발표했다. 금융시스템의 리스크가 위험한 수준에 진입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발표는 모든 참석자들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청중 중에는 래리 서머스도 포함돼 있었다.

시카고 대학의 유진 파머를 축으로 한 '효율적 시장 가설'(efficient-market hypothesis)은 1970년대부터 금융시장을 지배했다.

효율적 시장 가설은 금융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이 해당 자산의 가치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는 이론이다. 파머는 증권시장이 매우 효율적이어서 개별주가와 주식시장에 대한 정보가 즉시 주식 가격에 반영된다고 봤다. 기업의 주식가격은 해당 기업의 가치를 정확히 반영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금융시장에서의 가격은 자산을 정확히 적절한 가치에 두는 기능을 수행한다.



효율적 시장 가설이 금융경제학에서 확고한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투자자들의 비합리성이나 버블, 파괴적인 투기 등에 관한 주제는 학계에서 사라져버렸다.

1980년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마이클 젠슨 교수는 금융 시장이 항상 적정가격을 유지하기 때문에 기업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들의 주가를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자산가격결정모델(CAPM)의 영향력도 컸다. 1960년대부터 개발된 이후 30여 년 간 금융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 CAPM은 주식, 채권 등 자산의 기대수익률과 위험과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립시켰다. 물론 모든 투자자들이 '합리적으로' 위험과 보상사이에서 균형을 찾는다는 가정 하에서였다.



CAPM은 이론적으로 완벽했다. CAPM이 제시하는 통계적인 증거들 역시 이 이론을 매우 강력하게 지지해 줬다. 간결하고 명백한 새로운 이론의 유용성은 CAPM 창시자인 윌리엄 샤프에게 1990년 노벨 경제학상을 안겨줬다.

새로운 모델과 가공할만한 수학적 스킬로 무장한 CAPM은 비즈니스 스쿨 교수들을 월스트리트의 고액 연봉자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대공황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갔다. 1973~1974년에 주가가 48%나 폭락했고, 1987년에는 다우지수가 뚜렷한 이유 없이 하루 동안 23%가 하락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며 시장의 합리성에 대한 의심이 다시 고개를 들만도 했지만 주류 경제학의 아성에는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금융 이론가들은 그들의 모델이 근본적으로 옳다고 계속 믿어왔으며, 많은 사람들이 실제 세계에서도 그러한 이론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한다고 믿어왔다.

금융 규제반대를 지지했던 그린스펀은 역대 어떤 집값 버블도 현대 금융 경제학이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하에 서브프라임 대출 제한을 거부하기도 했다.
(3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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