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장 달인' 바이러스, 잡고 잡히는 싸움

머니투데이 신수영 기자 2009.09.0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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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잡는 신무기 개발전쟁<상>

지난달 26일 과학자들은 한 줄의 뉴스에 주목했다. 홍콩대 의과대학이 신종플루에 감염됐다가 회복된 사람의 항체를 이용해 새로운 신종인플루엔자(H1N1, 신종플루) 치료제를 개발하겠다는 소식이었다. 이반 훙 교수가 이끄는 이 연구팀은 신종플루가 지나간 사람들의 혈장 420L를 채취해 항체(고도면역글로블린)를 추출한 뒤 증세가 심각한 환자 63명의 치료에 쓸 계획이다.

이미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이긴 항체를 이용해 바이러스에 대항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신종플루와 싸움에서 항바이러스제(타미플루)나 예방 백신 외에 또 다른 방법이 있음을 보여준 뉴스였다.



◇바이러스, 항바이러스, 내성 바이러스=바이러스는 병원 미생물의 한 종류로 크기를 나노미터(nm, 10억분의 1미터) 단위로 측정해야 할 정도로 매우 작다. 작을 뿐 아니라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용하는 것이 다른 생명체(숙주)다. 숙주 속에 들어가 자라고 증식하고 다른 숙주로 옮겨간다.

신종플루 치료제로 쓰이는 항바이러스제는 바이러스가 숙주 속에서 증식한 뒤 다른 숙주로 이동하는 과정을 방해한다. 바이러스 증식과정은 48시간 내 최대에 달한다. 항바이러스제를 2일 이내 먹으라는 이유다.



바이러스도 살아남기 위해 염기서열에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항바이러스제의 방해를 받지 않도록 모습을 바꾸는 것이다. 독감인플루엔자는 1996년 출시 후 오랫동안 쓰인 타미플루에 거의 100% 내성이 생겼다.

상대적으로 적게 쓰인 리렌자는 내성 역시 적지만 안심은 못한다. 그래서 화학구조를 바꿔 변종 바이러스도 잡을 수 있게 만든 제3의 항바이러스제가 개발되고 있다. 미국 바이오크리스트가 개발한 '페라미비르'가 한 예다. 알약인 타미플루와 달리 페라미비르는 주사제다. 녹십자는 이 약의 국내 판권을 획득하고 올해 안에 시판허가를 받을 계획이다.

'변장 달인' 바이러스, 잡고 잡히는 싸움


◇백신 물량 어떻게 늘릴까..아이디어 부심= 항바이러스제는 이미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은 뒤에 사후 대응하는 약물이다. 여기서 한발짝 더 나가 미리 감염을 막는 방법이 예방백신이다.


각국은 혹시나 닥쳐올 가을철 대유행에 앞서 백신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그런데 백신접종 시기가 늦어지고 있다. 중국이 9월로 가장 빠르고 대부분 국가는 10~11월을 예상한다. 임상시험에 시간이 필요한데다, 신종플루 바이러스가 유정란에서 자라는 속도가 계절 독감에 비해 50~75% 정도 느리다.

속도가 느려지면 생산량이 줄어든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나온 것이 항원보강제다. 백신 균주를 2~4개로 쪼갠 뒤 항원보강제(스쿠알렌 또는 알루미늄)와 섞어 양을 부풀리거나 먼저 쪼개 둔 백신과 항원보강제를 접종 직전에 섞는다. 인체는 양을 늘린 만큼을 전부 바이러스로 인식하고 그 분량만큼의 항체를 생산한다. 결과적으로 1명분을 2~4개로 나눠쓸 수 있다.

유정란 대신 셀에서 바이러스를 배양하거나, 재조합 기술로 바이러스(항원) 가운데 백신 제조에 필요한 부분만 인공적으로 만드는 방법도 있다. 달걀에서 기르면 4~6개월이 걸리는 개발 기간이 셀은 13~16주로 단축된다. 그만큼 생산량도 늘어나 좋지만 셀 속에 소 알부민 등 각종 첨가물을 넣어줘야 하기 때문에 안전성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다. 해외에서는 백스터와 노바티스 등이 셀을 이용한 신종플루 백신을 만들고 있다.

국내 녹십자도 이 방식에 도전, 4~5년 뒤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이정석 식약청 바이오생약국장은 "셀 방식 등은 특허도 특허지만 기술이 어려워 응용이 까다롭다"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밝혔다.

바이러스백신을 재조합 기술로 만들 수도 있다. 원하는 부분만 만들면 되기 때문에 시간이 10~12주로 크게 줄어든다.

◇새로운 대안 항체 치료제=신종플루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은 이미 신종플루와 싸워 이겨 본 항체가 있다. 이를 추출해 다른 환자의 치료제로 쓰자는 생각은 예전부터 있었다. 지난 1918년 스페인 독감 때도 병에 걸렸다 나은 환자의 혈액 추출물을 투입한 결과 사망률이 50% 감소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혈액 추출물에 포함된 항체가 치료효과를 냈을 것이란 점에 착안, 과학자들은 항체를 이용한 바이러스 치료제 개발에 나섰다. 홍콩대 의과대학은 혈액 속에서 항체를 걸러낸 뒤 환자 몸속에 넣어 치료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단순한 항체가 아닌, 항체를 만드는 혈액 내 B세포를 분리해 항체의 유전정보를 얻는 방법이 있다. 특정 바이러스에만 반응하는 항체의 유전정보를 뽑아내 이를 임의적으로 대량생산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인류를 골치 아프게 하는 '변종'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주목된다. 항바이러스제는 물론이고 백신 역시 변종에는 무용지물이란 한계가 있다. 열심히 백신을 만드는 사이 변종이 출현하면 이미 만든 백신은 효과를 볼 수 없게 된다.

만일 바이러스 염기서열 가운데 바이러스 자체의 독성에 큰 영향을 미치며 변이가 잘 일어나지 않는 부분을 찾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꾸 변장하며 도망치는 바이러스에서 변장해도 바뀌지 않는 모습을 찾아내는 항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미 이런 방식으로 '변장한' 조류독감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치료제를 개발하는 곳이 있다. 유럽의 크루셀로 최근에는 이 치료제가 신종플루에도 효과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크루셀사의 조류독감 치료제는 현재 임상 1상 진입단계로 미국 국립보건원도 기대를 걸고 7000만 달러에 가까운 돈을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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