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집단적 따돌림에 대하여

머니투데이 박종면 편집인겸 더벨 대표이사 부사장 2009.08.31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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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 중 읽은 소설 '사마천'의 감동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아 책장에 꽂혀 있던 '사기열전'을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이사열전'과 '회음후열전'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사는 진시황의 책사이자 모신입니다. 진시황제를 도와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는 동문인 한비자까지 사약을 내려 죽게 합니다.
 
그러나 천하통일을 한 13년 후 이사 역시 간신 조고와 권력투쟁에서 패한 뒤 모반을 꾀했다는 이유로 허리가 잘리는 형벌을 받고 죽게 됩니다.
 
'회음후열전'은 장량과 함께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결정적 역할을 한 한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천하통일을 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던 항우를 그 유명한 해하전투에서 섬멸하는 공을 세운 사람이 한신입니다.
 
한신 역시 천하통일을 이룬 뒤에는 모반자로 몰리게 됩니다. 이때 한신은 한고조 유방 앞에서 자신의 부침 많은 인생을 한탄하며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사람들이 날랜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를 삶아 먹고, 높이 나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도 거두어 치우고, 적국이 망하면 지혜로운 신하는 죽는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내가 삶겨 죽는 것도 당연하지."

#이사와 한신 열전을 읽으면서 박병원 전 경제수석과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 생각이 났습니다. 감사원은 연초 박병원 전 수석이 우리금융지주 회장 시절 컨설팅업체를 선정한 일과 한미캐피탈을 인수한 게 부당한 것이었고, 엄청 비싸게 사서 회사에 손실을 안겼다고 주장하면서 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지요.
 
그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습니다. 그는 솔직하고 자유분방하고 직설적이어서 탈이지 천성부터가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누군가 그를 흔들었고, 정치적으로 희생됐을 것이라고요. 다행히 이달 초 검찰 수사 결과 무혐의 처분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지만 그가 받은 상처는 오래 남을 것입니다.



#금융권을 달구고 있는 황영기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의 파생상품 투자손실에 대한 문책 논란은 금융감독당국의 주장을 100%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해도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이미 몇 차례 거른 문제라며 소극적 입장을 보이던 금융감독당국이 왜 갑자기 강력 징계로 돌아섰고, 무엇에 쫓기듯 속전속결로 처리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외환위기 시절 부실을 초래한 은행장들보다도 훨씬 높은 '직무정지'라는, 사실상 현 KB금융지주 회장 자리까지 그만두고 나가라는 중징계를 예고하고 나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황영기 행장 다음으로 취임한 박해춘 행장 시절에 얼마든지 손절매를 통해 부실을 줄일 수 있었는데도 유독 황영기 행장에게만 사실상 금융권 추방을 명령하고 나섰는지도 혼란스런 대목입니다. 금융계의 상상력이 음모론으로 비약하고, 징계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대목들입니다.



#경제살리기 특별위원회를 맡아 전국 대선현장을 누볐고, 현 정부 초대 금융위원장 후보로까지 부상했던 황영기 회장에 대한 집단적 따돌림을 지켜보면서 어떤 이는 권력과 정치의 무상을 말합니다. 어떤 이는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현실과 타협하는 지혜를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신과 더불어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뒤에는 권력에 집착한 한신과 달리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장량을 배워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황영기 회장에 대한 집단적 따돌림과 초강력 징계를 보면 한국의 관료는 정말 영혼이 없다고, 한국의 관료는 정말 비겁하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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