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뷰]이제 DJ가 박정희를 만난다

머니투데이 박형기 산업부장 대우 2009.08.19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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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뷰]이제 DJ가 박정희를 만난다


중국 사람들이 한류에 열광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재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재미있을까요. 소재의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소재의 제한이 없을까요. 민주화 덕분입니다.

지금 중국 사람들은 우리가 70년대 유신시절 그랬던 것처럼 건전영화와 건전가요만을 보고 들어야 합니다. 중국은 공산당이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중국인에게 소재의 제한이 없는 한국의 문화 콘텐츠는 재미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한류의 핵심은 자유정신을 100% 발현케 한 민주화이고, 그 민주화의 상징이 김대중 전 대통령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몸을 바친 정치인이 한둘이 아니지만 DJ만큼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실제 생사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끝까지 수호했습니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도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며 이명박 정권에 직격탄을 날렸던 그입니다. 국가원로가 아닌 민주투사로 돌변하는 그를 보면서 아직도 민주화라는 화두를 붙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주화 이전에 산업화도 한류의 원동력입니다.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드는데, 그것을 담을 그릇이 변변치 않았다면 콘텐츠가 빛을 바랬을 겁니다. 산업화 세력이 콘텐츠를 받쳐주는 튼튼한 하드웨어를 만들었습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보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십수년 빨랐기 때문에 우리의 발전단계가 중국보다 한 단계 높습니다. 사실 단군 이래 우리가 중국보다 발전단계가 높았던 적은 아마도 없었을 겁니다. 그걸 가능케 했던 것이 산업화 세력이고, 그 상징은 박정희 전 대통령입니다.

결국 한국 전쟁 이후 한국사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업화 세력의 상징이 박정희, 민주화 세력의 상징이 김대중입니다. 두 분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시대의 라이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 분은 생전에 단 한차례만 직접 만났다고 합니다. 그들은 63년 국회의원인 DJ가 다른 의원들과 함께 청와대에 신년인사를 갔을 때, 만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합니다.

앞서 둘의 조우가 있을 뻔했습니다. DJ는 1958년 5월 4대 민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인제 출마를 결심합니다. 그러나 후보 추천인들의 서명이 자유당 후보와 겹친다는 이유로 선관위로부터 등록 무효 결정을 받습니다. 분노한 DJ는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선거부정 문제를 군대에 호소하겠다며 해당 지역 사단장 관사를 찾아갑니다. 당시 사단장은 부재중이었습니다.



그 사단장이 3년 후 5·16으로 정권을 잡는 박정희였습니다. DJ는 생전에 “운명은 그렇게 얄궂다. 만약 그때 거기서 그를 만났더라면 우리는 함께 부정선거에 대해 의논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면 최대 정적이 돼야 했던 운명도 조금은 바뀌었을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DJ는 생전에 자신을 사지에 몰아넣었던 정적 박정희를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그에게서 군인다운 순수를 높이 샀다. 그러나 그는 권력에 눈이 어두워지면서 정상 궤도에서 이탈해 갔다. 이 때문에 그와 화해할 기회를 만나지 못한 점을 애석하게 생각한다”고 적었습니다.

이제 한국 현대사의 두 영웅은 저승에서 만나게 됐습니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만남입니다. 저승에서나마 두 분이 화해하시길 바랍니다. 이를 계기로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이 하나가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MB정부가 말하는 선진화 세력의 시대일 수도 있고, 통일 세력의 시대일 수도 있을 겁니다.



분명 한 시대는 마감됐습니다. DJ와 함께 동 시대의 공기를 호흡 한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화 걱정일랑 마시고 부디 영면하십시오. 고기 맛을 본 중의 절에는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민주화의 맛을 이미 본 국민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가꾸어 나갈 겁니다. 영전에 국화 한 송이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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